단편

[석율그래] 졸업 상중하완

초록치마 2015. 4. 16. 23:41











졸업식 날 아침학교 앞은 붐볐다. 어느 반 어떤 학생이 서울대를 최종합격했다는 플랜카드가 교문 높이 걸렸고, 그 밑으로 한 철 장사를 노리는 꽃다발 장사꾼들이 즐비했다. 추운 겨울날 제 자식의 졸업을 축하하기 위해 한 껏 머리 세팅을 한 뒤 꽃다발을 들고 교문 안으로 들어오는 엄마들과 그 뒤에 적당히 빼입고 근엄한 표정으로 들어오는 아버지들. 졸업 당사자들은 부모들보다 한 시간 일찍 마지막 등교를 해 졸업식 리허설을 진행중이였다. 무대 앞 학년부장이 마이크에 대고 앉으라 서라 명령하면 학생들은 귀찮게 의자에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했고, 몇번의 움직임 후 2학년 학생회장이 앞에 나와 후배들의 졸업축하무대를 소개했다. 



반 별로 두 줄씩. 의자에 앉은 학생들은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걸 실감하는 듯, 한시도 쉼없이서로를 추억하며 조잘거리거나 손에 들고있는 스마트폰으로 셀카를 찍기 바빴다. 방송부 학생들은 마지막까지도 정신없이 음향과 조명을 체크하기 위해 뛰어다녔고, 학생회 아이들은 앞 줄에 앉아 막 입장한 선생님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무대로 올라가 상을 받기로 한 아이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호명되고 있다. 그렇게 우리의 마지막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석율아! 엄마왔다!” 



아.. 엄마 그렇게 안 불러도 알아요. 엄마는 조용히 졸업식이 치뤄지고 있는 강당 안에서 한 손에 꽃다발을 든 채 두 손을 붕붕 흔들며 존재감을 알린다. 엄마의 입에서 나오는 내 이름에 우리 반 아이들의 시선이 엄마에게로 집중됐고,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는 여전히 시선은 카메라에 고정한 채 우리 아들! 외친다. 창피해. 





“크큭” 

“뭐야. 왜 웃어” 

“너희 엄마랑 너랑 똑같다.” 

“칭찬이지?” 



졸업식날 마저도 내 옆에 앉은 그래는 우리 엄마와 나를 번갈아보더니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웃는다. 한쪽 눈이 작게 깜박이는 그 싱그러운 웃음에 할 말을 잃어 ‘칭찬이야 욕이야’ 따지지도 못하고 그래의 얼굴을 보며 나사가 풀린듯 미소가 번졌다. 고개를 숙인채 혼자 쿡쿡거리던 그래는 내가 저를 쳐다보는 시선을 눈치챘는지 고개를 들어 두 눈을 마주친다. 한 참 내 얼굴을 뜯어보던 그래는 조용히 내 눈가를 만지며 


“눈 완전 퉁퉁 부었네” 말한다. 바보, 지 눈 부은지도 모르고. 뭐 그래도 이쁜건 여전하다. 










졸업식 전날은 다같이 교실 대청소를 하고 사물함과 책상을 비웠다. 그리고 다같이 강당에 모여 가볍게 졸업식 리허설을 한 뒤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하교를 할 수 있었다. 담임의 종례와 함께 어느날 하교와 다름없이 왁자지껄 교실 문을 잽싸게 빠져나가는 아이들. 조금 굼뜬 그래는 이제 막 신발장에서 신발을 갈아신는다. 여느 때 처럼 그런 장그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함께 하교를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나는 문득 생각이 들었다. 누가 먼저 학교를 빠져나가나 시합이라도 하듯 뛰쳐나가는 아이들 틈 새로 조용히 책걸상을 정리하는 장그래, 텅 빈 신발장에서 본인 신발을 찾아 들고 조용히 실내화를 갈아 신는 장그래의 뒷모습도 오늘이 마지막이구나. 




생각해보니 장그래와 나 사이의 ‘마지막’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서로 노는 무리가 달라 가벼운 말 조차 섞기 어색했던 시절. 겨울방학이 끝나고 2학년 반을 배정받으며 ‘장그래랑 같은 반이네’라는 친구녀석의 한 마디에 우리는 1학년때 같은 반이였단 이유 하나만으로 동질감에 휩싸여 쌍둥이별자리처럼 2학년 생활을 함께 시작했다. 함께 노는 무리가 있긴 했지만, 체육시간에 소풍을 갈 때 둘둘 짝을 지어야할 때면 내 짝은 무조건 장그래였다. 그리고 3학년. 겨울 방학 내내 ‘넌 이제 시작이야’라는 선생님들의 잔소리에 전 학년이 야자실로 등교를 하는 시기. 고3이라는 무게감에 짓눌려 누가 어느 반에 배정받건 담임이 누구건 크게 신경쓰지 않을 시기, 난 누구보다 3학년 반 배정이 이뤄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게시판에 붙은 반 배정 표에 내 이름과 동시에 발견된 장그래 세 글자에 다소 왁자지껄한 아이들 틈에서 아무도 모르게 씨익 미소지었다. 그렇게 지난 3년동안 장그래와 나는 단 한번도 헤어질 틈이 없었다. 보통의 사내새끼들은 여자애들처럼 떨어지면 죽을 것처럼 구는 것은 없었지만 학년이 바뀌고 서로 반이 바뀌어 떨어지게 되면 내심 섭섭함을 보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래와 나는 그런 섭섭함을 느낄 기회조차 없었기에 ‘마지막’ 이라는 지금 이 상황이 굉장히 당황스럽고도 낯설었다. 우리의 마지막을 어떻게 보내야할지 다른 매마른 사내새끼들처럼 어깨나 툭 치고 헤어지면 되는 것인지. 아님 기집애들 처럼 부둥켜 안고 어떡해어떡해- 우는 소리라도 내야하나. 문득 이 상황이, 겁이 난다. 





신발을 다 갈아신은 그래는 내 어깨를 툭 치며 가자고 신호를 보냈다. 

“그래야. 오늘 우리 마지막 하교네” 




지난 3년의 감상에 젖어든 나는 그래에게 얘기했다. 오늘 우리가 함께하는 마지막이라고. 장그래는 ‘새끼, 간지럽게 왜그래’ 하고 피식 웃더니 먼저 계단을 내려갔다. 그런 장그래를 졸졸 쫒아가며 그래그래- 우리 마지막인데 그냥 그렇게 가고그래? 하고 장난스럽게 엽구리를 간지럽혔다. 그런 내 장난에 반격이라도 하듯 장그래는 뒤를 돌아 내 목 근처 야들거리는 살과 허리를 제 손으로 더듬거렸고 열 손가락이 따로따로 움직이며 주는 생경한 촉감에 몸을 베베꼬자 장그래는 쾌활하게 웃어보였다. 그 웃음 뒤로 창문을 통해 겨울 해가 쨍하게 비췄고, 햇빛 때문에 그래의 미소는 조금 어둑하게 보였다. 해를 등지고 있기 때문에 눈코입은 제 이목구비를 보이지 않았고 미소또한 그래의 입에서 나는 크하하- 소리로만 알 수 있는 것이었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환한 햇빛과 그래의 동그랗고 조그마한 머리통, 그 실루엣 때문에 눈이 시렸다. 시린 눈은 햇빛과 그 해를 등지고 있는 그래의 얼굴을 마주볼 수 없게 만들었다. 나는 아픈 두 눈을 손으로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석율아, 왜 울어” 



네가 너무 눈부셔서 그래. 입가에 맴도는 말은 눈물을 삼키느라 내뱉을 수 없었다. 정말인데, 그냥 눈부신 널 보니까 눈이 너무 시려서 눈물이 난 것 뿐인데. 다른 이유는 없어. 하지만 그래에게 내 눈물에 대한 변명은 할 수 없었다. 입 밖으로 내진 않아도, 장그래는 알고 있을 것이었다. 내가 우는 이유를. 지난 3년간 학교생활과 그 학교 생활 중 절반을 차지했던 장그래. 그리고 이젠 그 절반과의 마지막에 내 가슴에 절반만한 크기의 구멍이 뻥 뚤려버렸다. 그 가슴이 시린 눈 못지 않게 아팠다. 다신 못볼 수 도 있다는 생각. 날 잊을 수 도 있겠지 하는 걱정. 지난 2년 간( 앞서 말했다시피 1학년 때는 전혀 친하지 않았으므로) 함께 하교를 하자고 조른것도 등교를 위해서 매일 집앞에서 기다린 것도 전데, 핸드폰이 조금 심심할라 싶으면 까톡-하고 톡을 보낸 것도 점심시간 조용히 책을 읽는 장그래를 졸라 함께 운동장을 내려온 것도 전데, 더 이상 옆에 있지 않아 함께 하지 못할 것들이 많아지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어쩌면 나보다 더 좋은 친구를, 만날 수 도 있지 않을까. 그러다보면 장그래에게 한석율은 몇 장의 사진과 이름 세글자로만 기억되는 날도 오겠지. 




분명 눈이 부셔서 눈물이 난 것 뿐인데, 지난 3년간 장그래와의 추억이, 그리고 앞으로 나 없이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세상을 살 장그래의 미래가 주마등처럼 스쳐가 눈물을 멈추지 못한 나는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그런 나를 지켜보던 그래는 나를 일으켜 제 품에 꼭 안았다. 키도 덩치도 조금씩 나보다 작았기 때문에 내 품에 안긴 꼴이였지만 말이다. 장그래, 우리 진짜 마지막이라구. 내일이면 졸업이야. 눈물을 멈추지못해 끅끅거리는 나를 토닥이며 장그래는 답했다. 남자가 뭐 그런걸로 울고그래. 하지만 나는 그 목소리에 담긴 축축한 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날 토닥거리는 장그래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다울었으면 가자. 

 



전에 썼던 단편이야. 
상중하완으로 나뉘고 율-래-율-래 시점! 
bgm은 엠버의 i just wanna 고 fx의 goodbye summer의 가사 많이 참고했어! 
재밌게 봤다면 고마워 


+)
 



 겨우 눈물을 멈추고 집에 돌아가는 길. 난 장그래에게 꽤 개소리를 했던 것 같다. 장그래, 너 이쁜 얼굴 믿고 아무나 만나면 안돼. 넌 이뻐서 너보다 이쁜 여자 만날렴 힘들겠다. 그리고 나보다 더 친한 친구도 만들면 안돼. 알았지? 누가 뭐래도 제일 친한 친구 누구냐고 물어보면 무조건 나야. 무조건. 그리고 대학 갔다고 나 잊지마. 새로운 사람 만난다고 연락도 안하구 그럼… 안돼. 나 잊어버림 진짜 섭섭해.. 그래는 술을 거나하게 마신 것처럼 주정을 부리는 나를 달래주었다. 당연하지. 난 대학가도 너밖에 없어. 너 같은 친구는 너밖에 없을거야, 석율아.


 











어느 남자들이 그렇듯, 남자 셋 이상 모이면 접시가 깨지는 것이 아니라 온갖 야하고 추접한 이야기들이 오고 간다. 한석율과 내가 속해있는 무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석율이와 나, 단 둘이 있을 때는 절대 그럴 일이 없었지만 이상하게 녀석들과 함께 있으면 대화의 주제는 자연스럽게 이성, 섹스로 이어지곤 했다. 한석율과 나 또한 아는 건 많지 않았지만 대화를 주도하는 아이들 틈에서 실실 웃으며 동조를 하기도 했고 가끔은 영상으로만 봐온 것을 아는 척 툭툭 내던지기도 했다. 

그 날도 마찬가지였다. 고등학교 2학년, 아직 어리다면 어리고 순수하다면 순수해 한번도 진짜 신음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우리들은 여자 신음소리는 어떨까. 위에서 내려다보는 모습은 어떨까 음담패설을 나누는 중이었다. 그러다 대화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버렸다. 야 장그래, 너가 한 번 해보면 안되냐? 그래 새꺄, 니가 우리 중에선 그나마 여자역할 할 만 하잖아. 여자보다 예뻐가지고선. 호기심어린 말들에 순간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도 잠시였다. 아이들이 나를 대상으로 하는 소리가 추행인지도 모르고 ( 아마, 그 녀석들도 제 입에서 나오는 말이 추행인지 몰랐을 것이다.) 호기심에 휩싸인 나는 아이들의 장단에 맞춰 3개쯤 이어놓은 책상에 등을 놓았다. 책상에 누운 내 위로 사내녀석 한 명이 올라탔고 그 주변을 둘러싼 무리들이 워!! 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 소리에 마치 모래밭위에 놓인 투우사라도 되는 냥 호기로워진 나는 내 위에 올라탄 녀석과 박자를 쿵짝쿵짝 맞추며 한 번도 내본적 없는, 동영상에서 헐거벗은 여자들이 내는 소리를 기억해 입 밖으로 흘렸다. –사실 내위에 올라탄 녀석도, 나도 겁이 많아 서로의 몸은 멀찍이 떨어져있었다. 



그 때, 교무실에 들렸던 한석율이 뒤늦게 들어왔고 내 위에 올라탄 녀석과 너무 아무렇지 않게 같은 사내녀석 목을 안고 있는 날 발견했다. 항상 웃고 다니느라 넌 세상에 쪼갤것도 많다-며 놀림을 받던 한석율의 입꼬리가 서서히 제 위치를 찾아가고 있다. 앞 문을 열고 들어온 석율이는 더는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한 참을 서있더니 이내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해졌다. 그리고선 하는 말이 

“어디서 개씹 호모질이야 새끼들아” 





한석율의 화에 민망해진 나는 내 위의 녀석을 밀어내고 일어났다. 날 둘러쌓고 있던 주변 녀석들은 ‘아- 한석율 씹쌔끼 분위기 다망치네’ 하고 석율이를 나무랐다. 책상에 누워있느라 헝크러진 넥타이와 교복바지 위로 빠져나온 셔츠를 정리하면서 한석율과 눈이 마주쳤다. 차갑게 식은 그 눈엔 겨울유리의 서리와 같은 배신감이 서려있었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석율아 미안해’ 

교과서 한 귀퉁이에 조그맣게 사과문구를 적어 옆자리에 앉은 한석율에게로 내밀었다. 칠판으로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석율이 못본 것 같아 팔꿈치로 툭툭 치자 한석율은 제 몸을 피한다. 난 굴하지 않고 이번엔 한석율 교과서의 아랫귀퉁이에 다시 한 번 적었다. ‘미안해 석율아’ 교과서에 열심히 필기를 하느라 차마 제 교과서 귀퉁이에 적힌 내 필기체를 못본 척 할 수 없었던 한석율은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뭐가 미안한데?’ 도톰한 입술이 모양을 만들었다. 이번에는 한석율 교과서의 윗 귓퉁이에 조그맣게 적어내렸다. 


‘나 호모 아니야..’ 



나의 사과에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한석율은 그 날 석식을 먹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홀라당 야자실로 튀어버렸다. 석식을 함께 먹는 무리들은 은근하게 석율이 흉을 봤다. 재밌었는데 분위기 다 깬다. 개씹호모질이라니, 궁금해서 그런걸로 왜그렇게 진지빠냐 그새낀? 식판에 코를 박고 그렇게 흉보는 녀석들의 말을 듣고만 있던 나는 언뜻 한 녀석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그 새끼 뭐 찔리는거 아니야? 난 녀석의 말에 들고 있던 숟가락을 탕 내려놓고 자리를 박차 일어섰다. 

“석율이 그런 애 아니야.”





한석율의 화를 어떻게 달래줘야 할지. 사실 뭣 때문에 화가 났는지 정황은 대충 알겠지만 석율이가 뭐가 미안한대 라고 물으면 답할 정도까지의 이유는 몰랐기에 야자시간 3시간동안 발만 동동굴렀다. 눈 앞에 펼쳐놓은 외국어 모의고사 기출문제집은 3시간 내내 19번 문제에서 넘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18번까지 듣기 문제였으니 그냥 그날 공부 망했다고 말하는게 더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매일 같이 집가자고 조르던 한석율이 오늘은 내가 짐싸는 걸 기다려주기는 할까. 종치기 무섭게 다른 애들 틈새로 사라져버림 어쩌지. 석율과 화해하지 못할 가상상황들이 두 뇌를 휘집어 놓았다. 야자실의 시계는 어느덧 9시를 가르켰고 내 맘도 모르고 경쾌한 종이 울렸다. 그래 차라리 모른 척하자. 날 두고 매정하게 떠날 한석율의 뒷모습을 볼 자신이 없어 평소보다 더 느리게 짐을 쌌다. 한 문제도 보지 못한 문제집이건만, 마치 종이 울려 덮기 싫은 문제집을 한 문제라도 더 보려는 냥, 필통에 빠진 것은 없나 몇 번이나 뒤적거리고 떨어진 물건은 없나 바닥을 발로 휙휙 긁을 때쯤 등 뒤로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장그래 멀었냐” 





한석율은 그날도 어김없이 우리 집을 거치는 경로로 삥삥 돌아 제 집을 갔다. 가는 길, 뭐라 말을 꺼내야할지 모르겠어서 땀 나는 두 손으로 허벅지만 매만지고 있는데 다행히 한석율이 먼저 입을 열었다. 






“ 나 너한테 화난거 아니야” 
“…….” 
“그리고 너 호모 아닌거 알거든?!” 
“…….” 
“아 씹. 그니까 그게 아니라” 
“……” 
“그런거…. 상관없다고” 








니가 게이건 아니건, 너가 남자를 좋아해도 난 상관없다고. 우린 친구니까. 평소엔 잘 하지도 않는 욕을 내뱉으며 나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석율이의 모습에 웃음이 났다. 싸운 적 도 없었기에 화해도 어설픈 사이. 그 날 우리는 처음으로 화해라는 것을 했다. 다소 어설퍼 민망함에 서로 쳐다보지 못한 채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민망함이 사라질 무렵 나는 물었다. 대체 그럼 왜 그렇게 화를 냈냐고. 아무렇지 않은 나와 달리 한석율은 다시금 민망함에 달아올랐는지 쭈뼛쭈뼛대더니 목을 큼큼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있어 그런게. 둔탱아” 





§ 




강당에서 전교생이 모여 치뤄진 졸업식은 무사히 마쳤다. 우리 반 장백기는 전교 1등 성적으로 졸업해 서울대 독어독문과에 합격했고 그 대가로 전교생과 그 부모님들이 보는 앞에서 교장에게 표창장을 받았다. 장백기의 멀쑥한 외모에 뭇 여고생들이 술렁거렸고 부모들은 저 아이 부모는 전생에 뭔 덕을 쌓은거냐며 제 신세를 통탄했다. 
강당에서의 일정이 끝나고 이제 졸업생신분인 3학년들은 1반부터 차례대로 제 교실로 이동을 했다. 교실에서 담임와 함께 마지막을 인사하기 위함이였다. 각자 교실에서 가지고 온 의자를 도로 교실에 가져다둬야 했기에 아이들은 마지막 날까지 이래야 하냐고 투덜거리며 제 의자를 질질 끌고 강당 문으로 나섰고, 항상 품안에 작은 쇠막대기를 갖고 다니는 체육-학생주임-은 그런 아이들의 머리를 쇠막대로 툭툭 치며 의자끌지마! 소리를 질렀다. 비록 툭툭- 쳤대지만 꽤나 무게감있는 매 덕에 사내놈들은 포효했고 그 모습을 보던 부모들은 수군댔다. 졸업 마지막날, 아이들의 부모님까지 있다 해도 학주 눈에 학생은 그냥 말 안듣는 제 학생일 뿐이였다. 한석율은 조용히 제 의자를 들고 다른 빈 손으로 내가 앉아있던 의자를 들었다. 저러다 질질끈다고 한 대 맞을려고. 


돌아온 교실의 분위기는 다소 우울했다. 누가 틀어놨는지 모를 015B의 작별노래-이젠안녕-에 맞춰 지난 1년 시간을 추억하는 사진들이 흘러지나갔고, 몇몇 여자애들은 눈물을 뚝뚝흘리기도 했다. 평소라면 오글거린다며 괴성을 지를 덤덤한 사내놈들도 12년의 정규교육 시스템 속에서의 생활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체감이라도 하는 냥 제법 센치해진 것 같았다. 나 또한 딱히 시선을 둘 곳이 없어 멍하니 TV속 흘러가는 사진만 바라보았다. 1년간의 기억이 새록새록 돋았다. 그 때 마침 내 시선을 잡아끄는 사진이 화면위로 나왔다. 졸업여행 레크레이션 중 반 별 장기자랑 시간, 다른 반 같았으면 누구라도 하고싶다고 먼저 나설 사람 한 명 있었을 텐데 유달리 앞에 나서기 싫어하는 우리 반 아이들 때문에 곤란해하던 담임이 억지로 올려보냈던 장기자랑 무대. 그 위에 혼자 마이크를 잡고 눈을 굴리는 내 모습과 마치 걸그룹 아이돌이라도 보는 냥 포효하는 한석율. 불과 수능이 끝난 몇 개월 전 일이건만 먼지 쌓인 먼 기억이 탈탈 털려 수면 위로 올라오는 기분이 들어 약간 귀끝이 발개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 동안 수고했다는 담임의 마지막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들은 왁자지껄 제 친구를 찾아다니며 추억을 사진으로 남기기 바빴다. 설령 그닥 친하지 않았던 사이라 할지라도 지난 1년의 정을 무시할 순 없는지 나름 카메라 앞에서 다정한 포즈를 잡는다. 나 또한 꽃다발을 들고 온 엄마와 담임 사이에서 다정히 포즈를 취했다. 담임과의 기념촬영이 끝나기 무섭게 구석에 제 식구들에게 둘러 쌓여있던 한석율이 날 부른다. 








“그래그래!! 나 여깄어!” 


한 손엔 카메라를, 한 손엔 제 어머니에게 받은 꽃다발을 든 채 붕붕 흔드는 모습이 좀 전 졸업식에서 석율을 부르던 그의 어머니가 생각나 간지러운 웃음이 터졌다. 크큭. 괜히 닮았다고 한게 아니라니깐. 어수선한 아이들 틈새를 비집고 내 곁으로 온 석율이는 내 옆의 엄마에게 제법 어른 흉내를 내며 인사를 해왔다. ‘어머니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죠?’ 








‘한석율이 이 찌질이 많이 컸네- 졸업도 하고!’ 
물론 우리 엄마에게 통할 리가 만무했다. 











+)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던 한석율은 그렇게 우리 엄마와 한 번, 나와 엄마 셋이서 한 번. 그리고 나를 제 가족들 틈새로 데려가 제 가족들 사이에서 날 뻘쭘하게 만들어놓고 또 한 번 마구잡이로 사진을 찍었다. 우리 엄마를 여러 차례 봐왔던 석율이와는 달리 처음 마주하는 석율이의 
부모님과 누나들에게 ‘안녕하세요. 석율이 친구 장그래에요’ 라고 예의를 차려 인사를 하자 석율이 어머니는 마치 나를 어제라도 본 것 마냥 친근하게 대해주셨다. ‘아이고- 너가 그래구나? 우리 석율이가 어찌나 네 이름을 입에 달고 살던지’ 어른이 어려워 잘 대꾸하지 못하는 나는 그냥 수줍게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나와의 기념사진을 찍은 한석율은 다시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며 지나가는 애 하나하나를 붙잡고 사진을 찍어댄다. 그 즘에 나는 아이들과의 작별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얌전히 앉아있었다. 석율의 부모님도 지치셨는지 주차장에 가있겠다며 먼저 내려가셨고, 우리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사진 얼추 다 찍었음 가자- 식당 예약해놨어. 재촉하는 엄마에게 나는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부탁했다. 아직, 하지 못한 것들이 있었다. 엄마를 먼저 내려보내고 아직 함께 사진을 찍지 않은 아이들 몇 명과 사진을 찍고 나니 어느 새 몇몇 가족을 제외하곤 모두 사라진 뒤였다. 하지만 내가 그들과 함께 교실 밖으로 나서지 않았던 것은 앞서 말했듯 아직 하지 못한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저 멀리서 히죽대고 있는 한석율과 함께 해야할 것들 말이다.









저마다 알록달록 제 색을 뽐내는 꽃다발을 하나씩 안아든 아이들은 제각각 가족과, 친구와 혹은 선생님과 사진을 찍기 바쁘다. 마지막은 마지막인가봐- 실감하는 아이들은 지난 3년간의 추억을 오늘 찍는 사진 한 장으로 갈무리한다. 멀찌감치에서 서영이와 상훈이 커플이 나란히 셀카를 찍는다. 

둘은 막 고3이 되는 겨울방학, 야자실 좌석을 마주보고 배정받으면서 눈이 맞았다. 고개를 조금만 빼꼼히 들면 눈을 마주칠 수 있는 낮은 칸막이 책상. 그 책상 위로 서로에 대한 감정을 확인한 그들은 조금만 뻗으면 다리가 스칠만큼 가까운 책상 사이로 서로의 종아리를 간지럽히며 애정행각을 주고받았더란다. 고3이 들어서면서 각 반의 담임들은 ‘연애금지’ 라고 언포를 놓았는데, 사람 마음은 사람이 어찌할 수 있는게 아닌지라 오고가는 책상 밑 다리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둘의 비밀연애가 공개연애로 전환하게 된 계기는 우리학교의 전담 ‘조동아리’ 이상현에게 책상 밑 애정행각을 들킨 이후부터였다. 상훈이의 오른쪽 옆에 나란히 좌석을 배정받은 이상현은 어느 날부터 자습시간만 되면 책장을 도통 넘기질 않는 이상훈과, 낮은 책상 위로 고개를 빼꼼히 유난히도 자주 내미는 서영이, 그리고 종종 제 종아리를 스윽- 하고 스치다가 화둘짝 놀라 떨어지는 누군가의 발을 보며 둘의 연애를 직감했다고 한다. 이것들이 누구 몰래 연애야. 이상현은 그 즉시 나에게 달려와 호들갑을 떨었고 나를 감싸고 있던 주변녀석들과 그 옆의 기집애 무리들에게 이야기가 번지는건 시간문제였다. 정말 다행이였던 것은, 평소 상훈이와 서영이의 평판이 꽤나 좋았던 덕분에 아이들은 둘의 예쁜 연애를 지켜주자 암암리에 약속을 했고 그 결과 둘은 비밀연애 아닌 비밀연애를 지속할 수 있었다 

그랬던 둘도 어느새 오늘이 마지막과 다름없다는 것을, 제 아무리 연인 사이 라지만 둘 사이 관계에서도 분명한 변화가 있을 것을 직감했는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 않고 서로의 마지막을 확인하고 있다. 가벼운 포옹에서부터 서로의 손을 간지럽히고, 상훈이는 서영이의 두 볼을 쓰다듬는다. 조용히 서로의 눈을 지긋하게 바라보던 둘의 눈엔 물기가 맺히고 그렇지 않아도 눈물이 많기로 소문난 서영이는 기어코 상훈이의 어깨에 코를 박는다. 엉엉- 상후나 정말 끝은 아니게찌? 조용히 서영이의 어깨를 토닥이는 상훈이 뒤로 양 부모님들은 상견례도 치루지 못하고 서로를 조우한 것이 민망한지 어머, 쟤들이 왜 저래- 큼큼대는 소리만 반복했다. 




지난 4월 어느 날, 이상훈의 생일날은 온 교실이 소란스러웠었다. 연인이 된지 불과 100일이 되지 않은 서영이가 상훈이의 생일을 챙겨준답시고 작은 이벤트를 준비한 것 이였는데, 낙엽이 굴러가는 것만 봐도 꺄르륵- 거리는 고등학생들, 제 친구의 연애사는 그 어떤 연예인의 스캔들보다 회자가 되는 녀석들 사이에서 서영이의 이벤트는 물론 온 교실을 떠들썩하게 만들 일이었다. 교실 대형TV로 요새 유행하는 귀여운 아이돌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춘 서영이는 상훈이에게 몇 번을 접어서야 한 손에 들리는 커다란 전지편지와 평소 상훈이가 즐겨신는 스포츠브랜드 신발을 곱게 포장해서 전해주었다. 교실 뒷편, 그들을 빙그르르 둘러싼 아이들은 주책맞게 뽀뽀해! 뽀뽀해! 세박자 박수를 치며 호들갑을 떨었고, 이미 홍당무가 돼버린 상훈이는 서영이의 이마에 짧게 쪽-하고 입을 맞췄다. 아이들의 환호성이 교실을 뒤덮었다. 

그 때, 그 커플을 둘러싼 애들 가운데에는 그래도 있었다. 나와 맞은 편에서 상현이에게 몸을 기댄 채 그들을 구경하는 그래는 애들과 입 맞춰 뽀뽀해! 외치기도 하고 워!!! 하는 환호성을 지르기도 했다. 이목구비를 잔뜩 찡그린 채 그들을 바라보며 웃는 그래의 웃음이 싱그러웠다. 이상하게 나는 내 앞의 두 주인공을 놔두고, 그 옆에 있는 그래만 쳐다보고 싶었다. 이상했다. 

내 앞의 커플이 무엇을 하고있는지, 이미 그래에게 초점이 맞춰진 나는 눈은 그래를 제외한 그 누구도 무엇도 그냥 뿌옇게 보일 뿐 이였고, 아이들이 내지르는 소리는 귓가에서 왕왕 댔다. 저마다의 이유로 모여있는 아이들- 이벤트를 하기 위해, 그 광경을 보기위해-이 모두 그래를 빛나게 하는 안개꽃 처럼 보였다. 웃는 그래 얼굴을 보고있자니 내 심장께에 벌레 한마리가 기어다니는 것 같았다. 나도 그래를 보며 웃었다. 




그 날 집에 가는 길, 두 커플의 염장놀이를 함께 관람했음에도 그래는 마치 나와 그 장면을 함께 보지 못해 아쉽다는 듯 온갖 수식어를 붙여대며 내 귀에 조잘거렸다. 
“걔네 이쁘더라” 
“……” 
“그치?” 
“별로” 
“넌 그런거 싫어?” 
“….관심없어” 

죄없는 흙바닥을 발로 찼다. 사실 아까 그 시간 동안, 나에게 주인공은 너였어. 

할 말이 없어진 나는 관심없다는 말로 그래의 입에 자물쇠를 채웠다. 그래는 더 이상 나에게 이벤트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 마지막 겨울 방학, 수능을 마친 우리는 졸업여행을 떠났다. 이젠 없을 단체 여행. 전교생이 대절버스가 주차 돼있는 운동장으로 줄지어 집합했고 난 언제나 그러하듯 그래 옆자리를 차지했다. 

“그래그래, 무슨 짐이 이렇게 많아- 오빠가 들어줄까?” 
“닥쳐라 한석율” 


한 눈에 봐도 제 덩치만한 배낭을 등에 매고 구부정하게 서있는 장그래. 너무 버거워보여 장난스레 한마디 했는데 또 기집애 취급을 한다고 썽이 났는지 입을 쌜쭉인다. 한번 본인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곧 죽어도 아닌 장그래 성격을 알기에 장그래의 가방을 빼앗지도 못하고 아직도 쌜쭉이는 한 쪽 볼을 토독 두드려주고 말았다. 

버스 안에서 그래는 의자와 의자 사이를 떠다니는 과자 봉다리와 아이들 웃음소리가 거슬리지도 않는지 무언가를 인쇄해온 반 접은 A4용지만 쳐다보고 있다. 이미 해질대로 해져 꼬질꼬질해진 종이는 몇번 더 접었다 피면 금새 제 몸을 둘로 나눌 것 같았다. 구석탱이는 돌돌 말려있고 힘을 잃은 종이는 이미 축축하다. 

“장그래 뭐 보냐” 
“응 나 장기자랑할꺼 가사” 
“뭔데뭔데, 같이 봐. 내가 봐줄게 응?응?” 

창가에 앉은 그래는 종이를 제 등 뒤로 숨기더니 제 몸 쪽으로 상처를 기웃기웃대던 날 밀어버린다. 장난인줄은 알지만 조금 상처받은 나는 ‘윽’ 하며 앓는 소리를 냈고, 그래는 뭐가 창피한건지 쑥스러운건지 조용히 대답했다. ‘절대보안. 내일 들어’ 




어느 단체여행처럼 우리의 마지막 졸업여행도 이튿날 밤 레크레이션이 계획돼 있었고 그 시간에 반별 장기자랑은 거의 불문율에 가까웠다. 하지만 여느 반이나 앞에 나서길 좋아하는 애들이 있는 반면 웬일인지 우리 반만은 조용했다. 졸업여행 이주 전부터 1반은 여자애들이 섹시댄스 춘대. 5반은 남자새끼들 여장한다더라 하는 소문이 복도를 휩쓸었지만 여행 전 주까지도 우리반에는 ‘누가 장기자랑을 나갈 것인가’ 그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설마 먼저 그 이야기를 꺼냈다가 그럼 네가 하라는 화살을 맞을까봐 겁이 났던건지 장기자랑의 ㅈ자를 입 밖으로 꺼내는 것도 아이들은 조심스러웠다. 보다 못한 담임이 다른 반들은 다 정했다는데 우리 반만 명단 제출을 못했다며 쪽팔리다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물론 반쯤은 웃는 소리였다- 그 때 우리 반 조동아리 이상현이 장그래를 지목했다. ‘쌤 장그래 음악 수행평가 에이쁠이였어요!’ 

장그래는 남들 앞에 나서는 것에 유난히 얼굴을 붉히는 성격이긴 했지만 노래를 잘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시험이 끝나고 스트레스 풀 겸 노래방을 가자고 조르면 싫다고 내 손에서 제 팔을 빼다가도 어쩔 수 없이 따라와 한 곡 뽑을 때 그 목소리가 청아해 같이 따라온 여자애들 눈이 하트로 뿅뿅댔다. 그 것을 아는 아이들로 인해 분위기는 자연스레 장기자랑 장그래 단독무대로 몰렸고 담임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며 그래의 의사는 묻지도 않은 채 장그래의 이름으로 명단을 제출했다. 귀끝이 빨개진 그래는 책상에 얼굴을 뭍고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졸업 여행 마지막 밤. 안그래도 추운 겨울 날씨와 바다 바람 때문에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반 별 두 줄로 줄지어 대형 세미나룸에 모인 전교생들. 그리고 무대에서는 촌스럽게 뻔쩍대는 사이키조명과 결혼식에서나 볼 법한 드라이아이스 연기가 퐁퐁 뿜어져나왔다. 장기자랑을 할 학생들은 앞 줄에 앉으라는 진행자의 불호령으로 그래는 우리 반 맨 앞줄에 제 엉덩이를 댔고 실과 바늘처럼 그래 옆에 붙어있는 나 또한 맨 앞줄을 차지했다. 

짧은 반바지와 치마, 민소매를 입은 여자애들이 부끄러움도 모르는지 선정적이라고 말 많았던 한 여아이돌의 군무를 신나게 춰댄다. 교복에 가리워져 몰랐었던 제법 성인다운 가슴과 엉덩이, 매끄럽게 떨어지는 다리라인에 제 친구들의 숨겨진 여성미를 발견한 사내놈들은 포효하는 소리를 질러댔다. 맨 앞자리의 그래의 얼굴에는 긴장이 역력했다. 제 앞에 누가 춤을 추고 있는지 보이지도 않나보다. 

“우리 그래. 떨지말고 홧팅! 오빠가 응원한다.” 


시끄러운 음악소리에 그래의 귀에 속삭였더니 내 응원에 그래의 얼굴을 더더욱 발개졌다. 


무대를 가득 매웠던 여자애들이 우루루 사라지자 진행자는 그래를 소개했다. ‘네 다음은 3반에 용감한 친구가 혼자 노래를 한다고 하네요. 장그래 학생! 이름이 그래에요? 와 특이하다. 그래 안그래?’ 안그래도 이마에 나 긴장했어요 써 붙인 그래는 무대 위에 올라가 제 이름을 놀리는 진행자의 멘트에도 발끝만 쳐다보았다. 장그래 화띵!!!!!!!!!!!!!!!!! 내가 소리를 지르자 진행자는 어느새 자리를 비켜주었고 무대 한 가운데에 그래는 제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나에게 일급보안이라며 절대 알려주지 않던 노래의 전주가 어울리지 않는 빨간색-노란색 조명과 함께 흘러나왔다. 

노래가 시작되길 기다리며 숨죽이는 아이들. 나직한 그래의 목소리, 청아한 음색 그리고 통통 거리며 튀어 올라오는 비눗방울. 어느새 장그래는 그 곳의 공기를 장악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떨고있는지 빨개진 양쪽 귀와 마이크를 가지런히 잡고있는 두 손. 그리고 떼굴거리는 동그란 눈이 너무나도 장그래 스러워 난 그 공기를 견딜 수 없었다. 

나 너에게 갈게 이젠 말할게 너의 손을 잡고 싶어 
나 너에게 갈게 이젠 말할게 같은 꿈을 꾸고 싶어
 

긴장한 숨을 가누고 조용히 입을 여는 장그래. 그리고 하루에도 족히 열 번은 넘게 들어 너무나도 익숙한 그 멜로디와 가사에 난 응원해주겠다는 약속도 잊은 채 온 몸이 굳어갔다. 심장은 롤러코스터를 탈 때 처럼 곤두박질 친다. 이미 그래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는 아이들 사이에서 난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장그래의 얼굴만 쳐다봤다. 그리고 그런 날 보며 어느새 긴장이 풀려 자연스레 청중을 휘어잡고 있는 그래는 나와 눈을 마주치며 조용히 눈을 접어 웃어주었다. 얼마 전 새벽, 그래와 조용히 나누었던 전화 통화가 머리속을 가득 매웠다. 






새벽 1시. 공부를 하다 말고 누나가 크게 들어놓은 한 인디밴드의 음악소리에 홀려 깊게 생각할 것도 없이 순식간에 컬러링을 바꿔놓곤 장난스럽게 그래에게 톡을 날렸다. 

‘장그래 저나좀.’ 
‘열라 급함. 빨리’ 
‘콜미콜미’ 


톡을 보낸지 20분이 안된 시간. 우우우웅- 거리는 진동소리에 톡을 본 그래에게 온 전화라는 걸 알았지만 받지 않았다. 그 이후로 두 세 번 더 부재중전화가 찍히고 더는 전화할 생각이 없는지 까똑하고 알람소리가 울렸다. 

‘뭐야. 왜 안받아’ 

‘나 컬러링 바꿈ㅋㅋㅋㅋ 좋지?’ 

숫자의 1이 사라지고 또 다시 우우웅- 진동이 울렸다. 하나, 둘, 셋- 정확히 열까지 숫자를 센 뒤 액정의 초록버튼을 누르자 기다렸다는 듯 그래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뭐야 한석율- 이 새벽에” 
“좋지? 너 들려주고 싶어서” 
“응 좋다. 제목이 뭐야?” 
“응? 아.. 고백……” 


전화기 너머 그래의 작은 숨소리에서 나직히 웃음기가 번졌다. 

“가사가 좋네. 고마워” 





+)
 





그래와의 전화를 끊은 뒤 꺼진 거실 불 사이로 조용히 들어가 집 전화에 내 번호를 눌렀다. 방금 전까지 그래가 몇 번은 들었을, 콕 찝어 좋다고 해준 내 컬러링의 가사.



네 곁에서 걷는 게 싫어 한 번씩 너의 손이 스치잖아
그때마다 잡고 싶은데 하지만 난 그러면 안 되잖아

네 옆에 앉는 것도 싫어 내 어깨에 기대 잠들 거잖아
그렇게 네가 깰 때까지 서로 다른 꿈을 꾸는 거잖아 

난 그게 잘 안 돼 내 맘 숨긴 채 네 곁에 있어주는 게
이제 난 안돼 네 맘 편하게 친구로 있어주는 게





우우우웅 거리는 진동에는 우리 집의 번호가 뜬다. 그렇게 난 조용히 숨죽여 내 컬러링을 들었을 장그래 처럼, 전화기를 귀에 좀 더 가까이댔다. 하필 제목도 왜 고백이람- 다음 날 그래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하나 침대 위에서 몇 번의 하이킥을 한 뒤에야 잠에 들었다. 













고등학교 1학년 3월, 입학과 동시에 새로운 세계가 시작됐다. 우리 반에는 같은 출신 중학교 친구들이 몇 명 없었다. 그나마도 여자애들이 많아서 나는 친구를 사귀는 것이 힘들었다.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 나의 교우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고 점차 서로에 대해 알아가면서 말을트고 서로를 제 3자에게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아이들이 생겨났지만 그렇다고 그 애들이 절친마냥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였다. 그냥 쉬는시간 10분, 그 때 함께 노는 친구. 


한석율도 저와 같은 중학교에 다녔던 애들과 무리를 이루어다녔다. 다만 남중출신이었던 한석율은 우리 반 남자애들의 절반이 같은 중학교 출신이였기 때문에 유독 머릿수가 많은 시끄러운 무리를 형성했다. 그 애들 중에서도 몇 명 아이들은 나와 짝꿍을 하거나 조별과제를 하거나 혹은 수련회때 같은 방을 쓰면서 서로를 조금이나마 알아갈 수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한석율과 나는 한 반임에도 마주칠 기회가 도통 없었다. 한석율은 한 달에 한 번 자리를 바꿀 때 마다 뒷자리를 앉으려고 난리를 쳤다. 눈이 안좋다며 앞자리에 앉고싶단 친구와 무조건 자리를 바꿔주었다. 난 매번 그보다 앞 줄에 앉았기 때문에 걔가 뭘하는진 알 수 없었다. 그냥 조금 시끄럽고, 그래서 선생님한테 자주 이름을 불렸다는 것 밖에는. 가끔 내 옆자리에 앉은 여자애들에게 장난을 걸면 여자애들은 꺄르륵 거리며 그 장난을 받아주었고 한석율이 떠난 자리에서 굉장히 수줍어했었다. 


석율이는 나와 본격적으로 친해진 2학년 때부터 날 친구로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나에게 한석율의 존재감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1학년 5월 말 체육대회 날 이였다. 그러니까 그 날 한석율은 나에게 한 부분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석율과 그 친구들은 체육대회에 들떠 반장 어머니가 쏜 아이스크림을 입에 문 채 어느 남고생과 다름없는 혈기왕성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축구대항전에 나가 상대 팀의 백태클에 웃옷을 벗어 던지고, 걸려 넘어져 난 상처 위에는 모래알이 자글자글 붙어 지켜보던 내가 다 아렸다. 하얗던 운동복은 이미 모래 범벅이었다. 그런 한석율에게 가까이만 가도 땀냄새가 날 것 같았는데 땀 흘리는 것을 유독 싫어해 친구들의 칭얼거림에도 불구하고 벤치에만 앉아있던 나는 그 모습에 약간의 동경심이 들었다. 



체육선생의 호루라기와 함께 축구 경기가 끝나고 종목이 바뀌어 장애물 이어달리기가 시작됐다. 바쁘게 움직이는 선생님들은 운동장 한가운데 크게 원을 그리고 군데군데 훌라우프나 그물망, 메트리스 등 조금은 우스꽝스러울 만한 장애물을 군데군데 설치했다. 막 경기를 뛰고 온 한석율은 지치지도 않는지 입에 대고 꿀꺽꿀꺽 삼키던 페트병 물을 이내 머리위에 솟아붇곤 다시 운동장 한 가운데로 향했다. 


한석율! 한석율! 아이들은 한석율을 응원했다. 그런 아이들 틈에서 나도 낯선 네 이름을 외쳤다. 한석율! 한석율! 장애물 이어달리기 첫번째 주자 한석율. 한석율은 탕!소리와 함께 스탠드 반대편에서부터 궁딩이를 씰룩쌜룩 훌라우프를 돌리며 우스꽝스럽게 뛰어오더니 반의 반바퀴를 뛰어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있는 선생님 앞까지 뛰어왔다. 생전 훌라우프를 돌려본적이 없는건지 한석율은 제법 빨랐음에도 불구하고 7명중 4등으로 바구니 앞에 도착했다. 헥헥- 거리며 바구니 안에서 종이 하나씩을 가져가는 아이들이 저마다 제 반 아이들이 앉아있는 스탠드로 뛰어가 친구 팔목 하나씩을 잡고 뛰어간다. 순식간에 1학년들이 앉아있는 스탠드는 소란스러워졌다. 뭐야- 뭐야? 친구 한명씩 데리고 뛰나봐! 그리고 조금 늦게 도착한 한석율도 제빨리 종이를 펼쳐보더니 한석율! 한석율! 제이름을 외치고 있는 우리반 앞으로 와 아이들을 한 눈으로 훑기 시작한다. 그리곤 스탠딩 꽤나 끝 쪽에 앉아 끌고 내려오기도 힘든 내 팔목을 쑥 잡아빼냈다. 스탠딩 내 앞줄에 앉아있던 여자애들이 내가 내려오면서 제 옷에 흙을 뭍혔는지 작게 투덜거리는 것 같았다. 으윽! 뭐야! 한석율의 무지막지한 힘에 미끄러져 내려오듯 넘어질 것 처럼 아슬아슬하게 운동장에 착지한 나는 당황스러운 눈으로 한석율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장그래 뭐해! 따라와!! 하고 제 손아귀에 힘을 주고 날 끌어당기는 한석율 때문에 생전 겪어본 적 없는 스피드로 운동장을 질주했다. 흐윽..흑.. 숨이 가빠왔다. 반바퀴만 뛰면 되는 거리인데 천만리 길은 더 남은 것 같았다. 너무 힘들어 차마 고개를 들 힘도 없이 흙바닥만 보며 한석율이 이끄는대로 뛰고있자니 내 발 옆으로 몇 개의 발들이 뒤쳐져가는 것이 보였다. 꽤 차이가 나는 거리였던 것 같은데..… 역전을 한 모양이였다. 멀리서 덩치만큼 목소리도 큰 석호의 환호성이 들렸다. 


흑흑 거리며 넘어가지 않는 숨을 겨우겨우 들이마시고 정신을 차려보니 한석율에게 바톤을 물려받은 안영이가 1등 주자로 열심히 메트릭스 위를 구르고 있었고 내 옆에서 크하하하하 거리며 힘들지도 않은지 복식호흡으로 웃어대는 한석율이 보였다. 한쪽에서는 아직도 바톤을 넘겨받지 못한 다음주자들 몇몇이 동동거리고 저마다 이마가 바람에 다 까진 채 손을 잡고 뛰어오는 몇몇 주자들도 보였다. 그런데 웃긴 것은 손을 잡고 있는 주자들의 짝이 모두 여자인 것이다. 


“한석율. 미션이 뭐야?” 


내 말을 가뿐히 씹어드신 한석율은 곧이어 구석으로 돌아가라는 쌤의 고함소리 또한 가뿐히 씹어드신채 운동장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반 아이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향했다. 난 그런 한석율 뒤를 졸레졸레 쫒아갔다. 왜냐면 스탠딩에 얌전히 앉아있던 나를 끌어내리던 그 손아귀가 아직도 내 손목을 놓아주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기… 내 팔” 
“아, 미안” 

그제서야 한석율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내 팔을 놓아주었다. 얼마나 쎄게 잡아댔는지 팔이 조금 빨갛게 부어오른 것 처럼 보였다. 내 팔을 놓아준 한석율은 언제 구겨놓았는지 제 주머니에서 꾸깃꾸깃 구겨져 흙먼지가 묻은 작은 쪽지를 내밀곤 이내 저를 환호하는 아이들 틈새로 쏙 들어가버렸다. 난 제 자리에서 종이를 펼쳐보았다. 






‘반에서 제일 이쁜 친구 1명과 함께 뛰기’ 

종이는 다시 구깃구깃 접혀 내 체육복 주머니 속으로 들어왔다. 한석율에게 잡힌 팔목이 아직도 시큰거렸다. 











우리 반은 결국 장애물달리기에서 1등을 차지했고 거기서 얻은 점수 10점 차이로 전체대회 1등을 수상하는 영광을 얻었다. 모든 공은 한석율에게 돌아갔다. 체육대회가 끝난 아이들은 한석율을 둘러쌌다. 게 중 몇몇 애들은 한석율은 몸싸움도 잘했지만 머릿싸움에서 이긴거라고 침을 튀기며 칭찬했다. 


‘야, 거기서 진짜 이쁜 여자애 데리고 뛰었어봐. 어떻게 역전하냐? 남자애나 잡고 뛰니까 역전했지.’ 


틀린 소린 아니였다. 성차별적인 발언이 아니라 실제로 남자와 여자가 뛰는 속도는 차이가 있으니까, 안그래도 빠른 한석율의 속도에 맞춰 뛸 수 있는 여자애는 별로 없었다. 제 칭찬에 부끄럽지도 않은지 한석율은 뿌듯하게 스스로 자기 어깨를 몇 번 쓰다듬더니 이내 날 쓱 본 뒤 제 친구에게 말했다. 

“야, 밑에서 우리 반 애들 한 눈에 보는데 진짜 장그래만큼 이쁜애가 없었어. 괜히 같이 뛴게 아니라니깐” 

이 새끼 말도 존나 웃기게 하네. 한석율의 등을 퍽퍽 쳐대는 남자애들은 이내 수돗가로 사라져버렸다. 





담임은 제가 담임을 맡은 이래로 체육대회 1등은 처음이라며 아이들에게 짜장면을 쐈다. 야!! 노래방 가자!!!!!! 체육대회 1등에 이어 쉽게 열리지 않는 지갑한테 짜장면을 얻어먹어 흥이 날대로 난 아이들은 단합이나 하자며 우르르 노래방을 향했다. 답지 않게 무리를 한 것 같아-이어달리기의 여파가 백퍼였다- 조금 피곤한 나는 핑계를 대고 빠지려 했지만 짝꿍이었던 한석율 무리 중 한 명이 끝끝내 내 목을 잡고 놓아주지 않아 노래방 한 구석을 차지해야만 했다. 최근 나온 아이돌 노래는 모두 섭렵한 듯 신나게 춤을 춰대는 아이들 사이에서 조용히 박수만 치다가 이내 성화에 못이겨 조용히 노래 한 곡을 부르고 다시 자리에 앉아 아주머니가 보너스를 그만 좀 주시기를 간절히 얼마나 바랬던가. 결국 시간은 갔고, 노래방은 조용해졌다. 아이들은 아쉬움에 투덜대며 건물을 빠져 나왔다. 



“장그래, 어디가?” 
“나 저쪽” 


노래방에서 막 나오자 학원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실 책상에 앉는 동시에 고개를 박고 잠에 들 것 같이 눈커풀이 무거웠지만 노느라 피곤해서 학원 못가겠다고 하면 당장 빗자루를 들고 쫓아낼 엄마의 성격을 알기에 한석율의 물음에 조용히 학원이 몰려있는 골목을 가리켰다. 


“어 나두 학원가는데 같이 가자.” 


우리는 말이 없이 걸었다. 사실 우리 사이에 대화 소재가 존재하진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침묵이 크게 짐이 되진 않았다는 것이다. 친하지 않은 사이, 대화가 없다면 어색함에 몸을 베베 꼴만도 한데. _특히, 평소 말 많은 한석율은 더더욱- 한석율은 지금의 침묵을 크게 어색함으로 받아드리는 것 같지 않았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 점에서 한석율의 의외의 모습을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그저 조용히 내 옆에 네가 있구나 인식을 하며 서로 갈 길을 걸었다. 


그렇게 한 10분이나 걸었을까. 난 동산빌딩 이라고 현판이 달린 높다란 건물 앞에서 발을 멈췄다. 우리 학원은 그 건물의 6층에서 10층 꼭대기 층 까지 사용하는 꽤 큰 학원이었다. 그 밑 층에는 작은 보습학원 몇 개가 층마다 한 두개씩 자리잡고 있었다. 

“난 여기야.” 
한석율은 내 말을 듣고는 제가 먼저 발을 옮겨 건물 엘리베이터의 화살표버튼을 눌렀다. 


“너두 여기야?” 
“응” 
“아, 너 우리학원 밑에 다니는구나?” 


한석율은 아까 운동장에서처럼 맛있게 내 말을 씹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서로 말을 맛있게 씹어먹을 만큼 가까운 사인 아니다. 난 조금 황당한 마음에 입을 쌜죽대며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작아지는 것만을 바라봤다. 꼭대기 층에 멈춰있던 엘리베이터는 한 참을 내려올 생각을 않더니 8층, 6층, 3층 여러 번을 멈춘 뒤에야 띵동- 하며 양쪽 문이 드르륵 열린다. 


“빨리 타” 

먼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은 나는 한석율을 바라보았지만 어째 한석율은 탈 생각을 안한다. 난 급하게 안 쪽의 열림버튼을 눌렀다. 


“뭐야 안타?” 
그제서야 한석율은 또 한번 말을 씹으면 그땐 학원이고 뭐고 발 못 띌 줄 알아라- 하는 내 분노의 눈빛을 눈치챈건지 내 눈을 지긋이 쳐다보며 말했다. 


“난 여기 2층, 계단으로 가면 돼” 
“….응?” 
“잘가라” 


한석율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도 전에 엘리베이터 옆 계단이 있는 방향으로 휙- 하고 사라져버렸다. 뭐야? 나 엘리베이터 같이 기다려준거야? 어째서인지 기집애 취급 받는단 생각이 들었지만 기분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체육복에서 교복으로 갈아입으며 옮겨놓은 쪽지가 바지 주머니에서 사부작거렸다. 















어느덧 대 부분의 아이들이 빠져나간 교실, 담임도 교무실로 사라져버린 이 시간. 서로의 부모님을 주차장으로 먼저 내려보낸 한석율과 나는 텅 빈 우리의 마지막 교실에서 서로를 조우했다. 교실 뒷 편에는 수업시간에 졸린 학생들이 서서 들을 수 있도록 가슴팍 밑 쪽 까지 올라온 키다리책상 두어개가 있었다. 짝을 바꾸던 날, 서로 짝이 되지 못한게 아쉬워 우리는 졸린 척 키다리책상으로 나와 나란히 붙어섰다. 그리곤 사각사각 서로의 교과서 모퉁이에 낙서질을 했었지. 그러다 선생님이 이것들이 졸지말라고 들여온 책상에서 꼼수질이냐며 우리를 복도로 쫒아내면, 그 마저도 둘만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라 좋아하며 함께 나란히 창문 밖을 내다보곤 했었다. 


이제 다시는 마주할 수 없는 우리의 시간들. 되돌릴 수도 없고, 되돌아가고 싶지도 않은. 그냥 지금 이대로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은 우리의 사진들. 교실은 그렇게 우리가 몰래 찍어두었던 사진들로 가득 차 있었다. 서로의 이름이 작게 칼집 나있는 책상부터, 서로의 물건이 죄 섞여 내 사물함인지 네 사물함인지 알 수 없었던 작은 사물함, 끼익 거리며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면 등짝을 퍽퍽 때리며 긁지 말라고 한 소리를 냈던 칠판 그리고 창가에 앉은 한석율의 머리 위 까지 펄럭였던 하얀 커텐까지.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추억이 깃들지 않은 것이 없다. 

텅 빈 교실을 눈으로 한 바퀴 둘러보고 내 앞에 마주서있는 석율이의 눈을 쳐다봤다. 한석율의 깊은 눈 안 역시 텅 빈 교실 안 우리의 추억으로 가득 찬 듯 보였다. 

계절은 흐르고 시간은 가고, 봄이 가고 겨울이 오듯 우리에게도 헤어짐이 성큼 찾아와버렸다. 석율이도 알 것이였다. 더 이상 우리의 마지막을 미룰 수 없다는 것을. 졸업식 전 날 나를 부등켜 안고 펑펑 울던 두 눈은 이제 정말로 날 보낼 준비를 마친 듯 검고 깊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다행이였다. 마지막을 눈물로 보내지 않아서. 우리의 마지막을 눈물로 칠했더라면 앞으로 난 널 생각할 때, 넌 날 생각할 때 그 눈물의 습기와 염도가 가장 먼저 떠올랐겠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좋은 날들이 있었는데. 고작 서로를 눈물로 기억한다면 고등학교 3년의 추억이 분수대의 물 처럼 공중으로 흩어져버린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전 날 미리 울어준 석율이가 너무 고마웠다. 



“석율아.” 
“장그래” 
“그 동안 고마웠어” 
“그 동안 행복했어” 


우리는 더 길게 말을 하지 못했다. 서로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추억은 이미 벅찼다. 지금 내 뱉는 한 마디가 마치 곱게 인화중인 암실 속 필름에 햇빛을 비추는 것이 아닐까 두려웠다. 그래서 오롯이 서로의 눈을 마주보기만 했다. 


“넌, 내 좋은 친구야.” 
“그래야” 
“어제 말했지? 너 같은 친구는 너 밖에 없어. 넌 내 가장 친한 친구야.” 
“…… 그래, 너도” 
“……” 
“그래야. 넌 내 잊지 못할 하나뿐인, 친구야.” 


우리는 한 손으론 서로의 두 눈을 가리고 다른 한 손으로 서로의 귀를 막아주었다. 그렇게 우리의 암실을 지켰다. 이쁜 사진들이 암실을 침투하는 햇빛 때문에 망치지 않도록 서로 암실을 지키며 암막커튼을 꽁꽁 싸매었다. 어둠 속에서 볼 순 없지만 세상 모르는 아이처럼 환하게 이를 들어내며 웃는 석율이의 웃음을 느낄 수 있었다. 석율이 또한 나의 환한 웃음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으리라- 그렇게 우리는 마지막 추억을 장식했다. 더 이상 석율을 마주할 수 없다하더라도, 친구라는 이름이 원망스러워진다 하더라도 서로가 서로에게 예쁜 사진을 선물했으니, 그 것으로 만족했다. 



안녕, 한석율 
안녕, 장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