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새를 위하여 03
집에 도착한 백기는 전 날 집을 떠나왔을 때와 사뭇 다른 분위기를 실감했다. 찬 바람이 외투 안쪽을 훑고 다시 나가는 으슬함과 동시에 창호를 바른 문이 덜컹 거리며 이내 닫혔다. 나무 짚으로 만든 대문이 열렸다 다시 닫히는 소리가 들렸지만 자신을 마중나오는 이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는 또 무슨 생각에 코 빠져있는 것 일까. 쉽게 방문을 열 수 없었다. 아마, 복잡한 그래의 심경을 이해하면서도 잠시만- 혼자 생각할 시간을 주고 싶었나보다.
집에서 나오자마자 마주쳤던 동식, 그리고 동식에게 전해들은 소식 –잠시 조선을 떠나면 어떻겠냐는-과 자세한 이야기는 그래에게 전하겠다며 발을 돌리던 동식의 지난 모습에 백기는 쉽사리 그래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마루에 걸터앉아 둘 데 없는 시야를 너른 하늘에 두고 있는지 몇 십분이 흘렀을까. 삐그덕- 하며 나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따듯한 온기가 백기를 향한다. 한 손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개떡이 담긴 접시를 든 그래는 신도 벗지 않고 멍하니 하늘만 보고있는 백기의 옆에 조용히 앉았다.
“좀 드세요”
“그래야”
“많이 먹어야.. 기운 내죠”
접시를 백기와 제 몸 사이에 내려놓은 그래는 백기가 한 손으로 따듯한 떡을 쥐어 입에 넣는 것을 확인한 뒤 품 안에서 동식에게 전해받은, 꾸깃꾸깃한 종이를 내밀었다. 이 종이를 쥐고 지난 밤 얼마나 고민을 했을까. 어쩌면 밤 새 잠을 못 이뤘을지도 모른다. 종이 한 구석은 간 밤 수십번을 거친 그래의 손길로 해진지 오래였다. 그 해진 한 구석에 간밤의 시름이 담긴 것이 훤해 백기는 쉽게 종이를 펼칠 수 없었다. 종이를 펼치면- 그 안 그래의 한숨이 바람과 함께 온 집안에 퍼져 저를 잡아먹을 것 같은 두려움이 들었다. 그래는 종이를 받아든 백기를 보며 고했다. 당신 결정, 무엇이든 따를게요.
너를 위해 투쟁을 하겠다고 했지만, 그 투쟁 중 너와 내가 떨어져도 괜찮은 것일까. 답은 아니였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조금 더 일찍 해방된 세상을 만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세상에서 우리가 좀 더 빨리 행복할 수 있다면 잠시의 이별은 눈 꼭 감고 밤하늘의 별만 샌다면 사라질 고통이었다. 그저 짓눌리는 가슴의 고통을 잠시 참으면 될 뿐이였다. 하지만, 제가 없는 곳에서 저를 기다릴 그래의 고통은 누가 감싸줄 수 있을까. 사랑하는 이의 생사도 확인 할 수 없는 위험하고 먼 거리, 저로 인해 언제 일본경찰이 처들어와 집을 쑥대밭을 만들어놓고 가버릴지 모를 불안감. 단지, 잠시 이별의 문제가 아니였다. 어쩌면- 저로 인해 그래가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늪에 빠져버리는 것이 아닐까. 불안하다.
백기는 찬 겨울바람에 끝이 발개진 그래의 손을 잡아쥐었다. 아무 말없이 잡힌 제 손을 바라보던 그래는 이내 두 손을 풀어 백기의 목에 감싼다. 그에 답을 주듯 백기 또한 그래의 마른 허리를 제 팔로 감싸고 둘은 그렇게 한 참을 서로의 상체를 맞대고 온기를 나눴다.
“장백기. 해방... 되겠지?”
“응”
“해방되면, 함께 일 수 있지?”
“...응”
“......해방된 조국에서 봐요.”
“......”
“해방된 조국에서 맘 편히 연애해요, 우리”
둘은 추운 겨울 바람 사이에서도 서로의 온기에 의지했다. 맞단 이마 아래로 찬찬히, 한참 다시 보지 못할 것을 각오하는 냥 시선을 움직여 서로의 얼굴을 관찰하던 둘은 이내 조용히 붉은 두 입술을 맞대었다. 입 안으로 서로의 숨결이 전해져온다. 백기의 혀가 그래의 입술을 두어번 핥으며 노크를 하자 그래의 입이 열렸고, 그 안으로 백기의 것이 침범한다. 고른 이를 위아래로 훑은 뒤 입 천장을 톡톡 건드리자 그에 반응하듯 백기의 목을 안고있던 그래의 손에 힘이 들어가 둘의 상체는 한 치의 공간도 보이지 않게 서로를 결박했다. 혀가 입안 구석구석을 자극시키고 자극받은 침샘은 끊임없이 타액을 분비하지만 이성을 잃고 움직이는 혀에 주인을 알 수 없게 섞여버린 타액은 다시 입 안으로 흘러 들어간다.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래를 제 무릎에 앉히고 온 얼굴을 핥듯 쪽쪽 입을 맞춘 백기는 그래의 엉덩이와 허벅지 사이 제 손에 힘을 실어 창호지 한 겹이 바람을 막아주는 방 안으로 들어올렸다. 땔감을 땐게 언젠지 그닥 따듯하지 못한 바닥도 백기의 욕망 앞에선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한 귀퉁이에 깔려진 도톰한 요 위로 그래를 눞인 백기는 얌전히 저의 손길을 따라오는 그래의 이마를 한 손으로 슬슬 쓸어준 뒤, 그래의 상체를 가리고 있는 상의의 매듭을 풀었다. 아직은 밤 하늘이 둘의 사랑을 어둠으로 가리긴 이른 시간. 둘은 오롯이 서로를 관찰하며 사랑을 나눴다.
“한석율이라고 했던가.”
거대한 원목탁자 앞 고급 소가죽으로 만들어진 소파 위에 몸을 놓인 경무국장 아카시는 제 앞에 새빠진 양복을 입고 한 껏 긴장한 채 서있는 석율에게 시선을 향했다.
“그래, 조선인이 이 자리까지 오다니 대단하군”
석율은 허리를 숙였다. 과찬이십니다. 동경대학을 수석졸업하고 곧 이어 사법과와 행정과 문관시험 동시합격이라 조선인 중에선 보기 드문 인재야. 앞으로 황국신민으로서의 자제를 보여줘. 석율은 또 다시 허리를 숙였다. 숙인 허리 아래로 아카시에 대한 존경이 스물스물 올라왔다.
석율은 18살 어린 나이에 동경을 떠나는 배를 탔다. 그리고 조선 땅을 밟은 것은 어언 7년 만이였다. 7년, 강산이 바뀌진 않았지만 조선의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거리를 메웠던 조선 상인의 가게 중 절반은 낯선 영어와 일어 간판으로 바뀌었다. 조선을 떠나기 전 대부분의 아낙네들이 입던 흰 저고리와 검은 치마는 사라진지 오래였다. 부끄럽지도 않은 지 몸 선을 드러내는 긴 치마를 입은 여성도 곳곳 눈에 띄였고 알록달록 외제 천으로 만든 한복을 입은 여자들도 다수였다. 남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전통 한복은 온데 간데 없이 알록달록 양복을 빼입은 룸펜들, 그들의 머리 위엔 얍실한 베레모가 앉아있다.
한 층 변화한 경성의 거리를 뒤로 한 채 석율은 조선총독부 건물을 향했다. 오늘, 이 큰 건물에 드디어 저의 책상이 마련된다. 경무국장 아카시는 저에게 부탁조의 지시를 내렸다. 앞으로 여기저기 반란하는 조선인들을 자네가 잘 신경써주길 바라네. 주인 모르는 개들은 같은 개가 잘 물어뜯어줘야하지 않겠나, 허허. 개싸움은 주인도 못말린단 말일세-
그의 지시에 고개를 숙여 대답하는 한석율. 저를 개로 표현하는 어금니 근처 근육이 움찔댔지만 아카시, 그는 앞으로 존경하고 존경해야할 저의 상사였다. 지시 잘 따르겠습니다. 석율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두 눈꼬리를 접어 웃어보였다.
지난 밤 몇번이나 사랑을 나눴던 것 일까. 눈을 뜬 백기는 제 옆에 있어야할 온기가 빈 자리에 허전함을 느껴 몸을 일으켰다. 몸이 약간 찌뿌둥했다. 딱딱하고 찬 바닥, 간 밤의 운동으로 저보다 더 몸에 무리가 갔을 그래는 어디에 간 것인지 부엌에서 달그닥 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그래야"
역시나 제 부름에 어떤 답도 없다.
한참을 잠에 취해있던 백기는 그래를 찾으러 나가야겠다는 생각에 두 다리에 힘을 줘 일어섰다. 삐잉- 하고 뇌가 흔들리듯 잠시 어지러웠지만 그 덕분에 이내 정신을 차렸다. 그리곤 문 앞에 있는 작은 짐 보따리를 발견했다.
하얀 낡은 천 안, 백기가 평소 즐겨입던 누빔 옷 몇 벌과 잿빛 정장 한 벌. 그리고 그 위에 선명하게 쓰여진 그래의 글씨
[잘 가요. 얼굴보면 못 보낼꺼 같아서 도망쳐요. 마지막이 아니니깐, 또 볼 수 있을거라 믿어요.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