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어린 새를 위하여 10

초록치마 2015. 4. 21. 20:20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는 그래는 인기척에 정신을 차리고 나서야 문 앞에 서성이고 있는 누군 가를 발견했다. 이틀 전 백기가 행복했던 시간들을 뒤로 한 채 떠나버리고, 다시 혼자가 되어버린 후 그래는 가게에 나가보지도 않고 혼자 잡념을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정신 차리자- 장 그래 혼자 되새기기를 몇 번. 걸음을 디딜 힘 도 없는 그래는 가는 다리를 통통 두드리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세요?” 



허나 문을 열고서 도 한 참을 제 눈에 보이는 것을 믿지 못할 듯 멍하니 서있고 나서야 돌아온 정신은 아직도 믿기 지가 않아서 껌벅 껌벅 눈만 뜨고, 입을 반 쯤 열고 어버버 걸다가 겨우 내 뱉은 말. 



“백기야” 



바로 만주로 떠날거라던 네가 왜 여기 있는 것인지, 돌아온 백기는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어서는 서 있는 것 조차 위태롭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흔들거리던 백기의 몸뚱이는 결국 감기는 눈과 동시에 흔들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장 백기!!!!” 
















‘나으리, 저 자 그냥 보내면 안돼요. 흉악범입니다.’ 



고등 경찰은 비틀거리며 걸음 하나조차 쉽게 띄지 못하는 장백기의 뒷 모습을 보며 말했다. 석율의 명령이 떨어지면 곧바로 그의 뒷 목을 낚아 챌 양 백기에 대해 쓴 말을 뱉어대는 그의 걸걸 한 목소리에 석율은 짜증이 확 솟아 대꾸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냅 둬’ 

‘분명히 말 하는데, 내 명령 없이 저 자에게 접근하면’ 

‘너부터 끝날 줄 알아’ 



제 상사가 맘에 안드는 경찰은 쾅- 소리를 내며 문을 닫고 나가버렸고, 검은 방 안에 혼자 남은 석율은 방금 전 제 앞을 마주 보고 앉아 있던 싸늘한 얼굴을 상기시켰다. 



‘그럼, 장그래는’ 



총독부 지하실, 취조 중 낯선 이의 입에서 나오는 제 연인의 이름에 어찌나 당황을 하는지, 흔들리는 두 눈동자가 흡사 동경 유학 시절 경험했던 지진 만큼이나 빠르게 흔들려 석율의 비웃음을 자아냈다. 그토록 불안할 것이 였더라면 애초에 그를 조선에 혼자 두지 말았어야지. 그 것도 아니라면 독립운동을 하지를 말았어야지. 그와 편지를 주고 받지 말았어야지 왜, 장그래를 내 눈에 띄게 해? 



‘ 네 처마에 둥지를 틀었다고 네가 주인은 아니지’ 

‘ 어린 새가 언제 커서 날개 짓을 할지 알고’ 

‘ 천하태평 해’ 



석율의 도발에 흔들리는 것도 잠시, 분노로 활활 타오르는 눈은 저를 찢어 죽일 듯이 쏘아 본다. 하얗게 질린 주먹 밑으로 손톱이 파고들어 보는 이가 눈살을 찌푸렸다. 제가 경멸하는 적에게도 존대를 하던 평정심은 격양된 목소리에 파묻혀 사라진지 오래. 



‘내가 원하는 일이 장그래가 원하는 일이고, 그래가 원하는 게 내 일이야. 우린 절대 떨어질 일 없어. 네가 방해해도 조국이 방해해도 우린 다시 만나. 난, 장그래를 다시 만나기 위해 사는 사람이야.’ 



그의 호기로움에 석율은 대항할 말이 없어 그냥 눈을 감았다. 





이미 피떡이 돼버린 장백기를 별다른 수확 없이 돌려보내고 집으로 돌아온 석율은, 너저분한 책상에 발을 올리고 선 한 참을 골똘히 생각했다. 아버지가 새로 마련해주신 집은 아직도 짐이 정리되지 않은 채 겨우 가구만이 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장백기는 임무를 실패했고 만주로 돌아가지 못했다. 형무소에 갇히진 않았지만, 당장 그를 돌려보낸 그 순간부터 그를 향한 감시는 삼엄하다. 임무를 실패한 동지- 조직을 위험에 노출 시킨 동지를 조직에서 다시 받아줄까. 혹여나, 받아준다 하더라도 지금 당장은 무리일 것이다. 총독부가 그를 주시할 것이란 예상을 하지 못할 바보는 없으니까. 



오상식은 너무나 도 쉽게 제 흔적을 흘려버렸다. 평소 오 상식의 소문은 석율이 일본에 있을 적 부터 자자해 귀에 박히게 들어온 것들이었다. 게릴라 전투에 능할 뿐 아니라 전술을 짜는 능력과 위기상황 대처 능력도 완벽해 총독부가 그를 잡지 못해 애를 먹고 있다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쉽사리 입에 올리지 못했다. 그런 오 상식이 이렇게 큰 실수를 범해 조직의 존폐를 위협 시키다니. 그 답지 못한 일들 투성이다. 



‘왜 날 풀어주는 거지?’ 

‘가서 둥지나 지켜.’ 



어쨌든 중요한 것은, 현재 장 백기가 조선에 있고 당장은 이 곳을 떠나지 않을 것이란 사실이다. 아직 완벽히 ‘혼자’가 아닌 장그래를 취하기엔, 조금 이를 수 도. 












“백기야, 정신이 들어?” 



눈을 떠보니 제 연인이 동그란 눈을 데굴데굴 굴려가며 저를 내려보고 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눈을 꾹, 감았다 뜨면 금세 시공간이 바뀌어버린다.. 역사 안에서 취조실로, 취조실에서 그래의 품 안으로... 그럼 이 것은 꿈인가. 백기는 다시 한 번 눈꺼풀을 깊게 감아 들어 올렸다. 꿈이 아닌 가보다. 여전히 사랑스러운 그래의 얼굴이 시야에 가득하다. 데구루루 굴러가는 눈동자가 투명한 것이 언제 눈물이 똑 떨어질 지 모를 만큼 눈가가 발개진. 




“백기야, 내가 보여?” 



흑..흐읍…. 아니나 다를까. 투명한 눈알이 금세 눈물 줄기를 만들어낸다. 위아래로 앙 다물려 꾸불거리는 입 꼬리는 그가 얼마나 눈물을 참으려 애쓰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 백기는 한 참을 그 말끔한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안돼. 울면 안되는데… 내 연인인데, 울면 안되는데. 나 때문에 울면 안되는데. 



백기는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연인의 눈물을 닦아줘야만 한다. 그런데, 윽. 단발 마에 흘러나오는 신음. 몸을 일으키자마자 등을 덮쳐 오는 지난 밤 매질의 고통이 의도와는 다르게 신음 만을 내 뱉게 한다. 



“가만히 있어...흑…. 일어나지 마” 



그런 저를 보고 저 보다 더 놀란 그래는 목이 눈물로 턱턱 막혀와 꺽꺽 거리며 울음소릴 내는데, 눈물로 다 젖어버린 얼굴이 사랑스럽고, 또 미안해 백기는 제 손을 어쩔 줄을 몰랐다. 그래의 눈물을 닦아주기엔 너무 더러운 손. 상처 투성이. 으어엉...흑..흐읍..흡… 어떻게… 어떻..게 된 거야..흐윽..힉… 작은 뒤통수를 가슴팍으로 끌어당기자 얌전히 안겨오는 머리를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백기는 미안함 만이 가득했다. 



“순사한테..윽...걸린 거야?” 



내 앞에서 그렇게 눈물을 뚝뚝 흘리는 얼굴로 물어보면, 내가 뭐라고 해야할까. 사실대로, 나에게 있었던 일들을 말한다면 더 일그러질 네 얼굴을 봐야하는데. 그 것을 오롯이 보는 것이 내 몫인데.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백기는 


“나 여기 혼자 왔어?” 


그냥 기억나지 않는 지난 시간을 되짚어 물었다. 



그래는 저를 쳐다보는 진득한 눈에 더는 묻지 못하고, 백기의 물음에 답을 주었다. 문 밖에 사람이 있길래 문을 열었고, 네가 날 보더니 내 몸에 기대며 쓰러져 버렸고… 


그래는 제 몸보다는 족히 절반은 더 커 보이는 덩치를 겨우 눕히고 서야, 그래는 백기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떠나기 전 홀쭉했던 두 볼이, 퉁퉁 부어올라 볼록하다. 매질을 참느라 꽉 다물었던 입술은 불어 터져 그 경계가 모호해지기 까지 한다. 눈가에 보기 힘든 시퍼런 멍과 그래의 뒤통수를 쓰다듬던 커다란 손은 가는 상처의 흔적이 보인다. 그래는 눕힌 상체의 매듭을 조심스럽게 풀어보았다. 



“으윽” 



도대체 너,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온 몸을 시퍼렇게 물들인 멍에 팔 위로 소름이 돋은 그래는 저절로 미간을 찌푸린다. 보는 사람이 이렇게 아픈데, 본인은 오죽 할까. 혹여나 제 손에 상처가 닿을까 조심스러운 손 길로 백기의 옷을 살살 벗겨낸 그래는 작은 대야에 따듯한 물을 퍼 날랐다. 


부드러운 수건을 적셔 백기의 얼굴과 목, 가슴팍까지 조심스러운 손길로 살살, 닦자 먼지 위에서 구르기라도 한 건지 거뭇거뭇 한 때가 지워지고, 아직 여물지 못한 상처 위를 톡톡 닦아내자 흰 수건이 금세 붉게 물들어버렸다. 어떻게 참았어. 백기야… 이토록 잔인한 매질을 어떻게 참아왔을 지 도저히 상상조차 안돼서. 그런데도 나는, 고작 눈물 하나를 참지 못해서. 혹여나 정신을 놓은 백기가, 소리를 들을까 입을 틀어 막은 그래는 벽 한쪽에 기대 한 참을 눈물만 흘렸다. 처음으로, 독립 운동을 하겠다는 백기를 막지 못한 자신이 미워졌다. 














영이가 찾아왔다. 그녀는 국내에 그 개 수를 열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희소한 여자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으로 유학을 갔다. 유학 생활 중 만난 조선인들과 함께 시를 쓰고 합평을 하는 재미에 푹 빠진 그녀는 유학 생활을 다 끝내지 못하고 조선으로 다시 들어왔다. 유학 생활을 마치지 못한 것에 대해 비난을 쏟는 주위 시선과는 달리, 각종 문예지에 그녀의 시가 올라왔고, 완벽한 여류 시인으로 등단한 그녀는, 화려한 외모처럼 어딜 가나 주목 받는 존재가 되었다. 




그런 그녀가 백기를 찾은 이유는 



“오 대장님 전달 사항이에요.” 




목적지 없이 돌아다니는 인력거는 양 옆에 검은 천을 내려 그 안에 누가 타고 있는지 볼 수 없게 도와준다. 삐걱삐걱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와, 인력꾼이 헥헥거리는 숨소리, 모래 위를 거칠게 딛는 발걸음이 둘의 대화를 세상 밖으로부터 가려준다. 





“조직을 위해선, 누군가가 희생을 해야만 해요.” 

“...이번엔 그 희생이 제 몫 이였군요.” 

“저도 유감입니다.” 

“...... 누군가 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은, 저도 공감합니다. 허나 이 건, 이 건 그냥 미끼 노릇이잖아요. 원래 저에게 자금을 전달하는 역할을 하는 분은 어떻게 되셨죠. 아마, 저 보다 상황이 더 안 좋을지도 모르겠네요. 독립, 좋아요. 투쟁도 좋고 전투도 좋고. 조국을 위한 희생. 영광스럽죠. 그러나, 제가 만약 단순한 미끼였다는 것 도 모른 채 이번 거사에서 죽음을 당했다면 제 한은 누가 풀어주나요. 내가 조직의 꼬리였다는 것도 모르고. 꼬리 자르기로 이 판에서 낙오되고, 이 세상에서 낙오됐다는 것 조차 몰랐을 희생자는 요?” 



울퉁불퉁한 땅 위를 움직이느라 몸이 덜컹거렸다. 백기가 마당의 먼지를 쓸고 있을 때 제 집 앞으로 멈춘 인력거. 장백기씨 맞으시죠? 인력 꾼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자 빼곰히 열리는 천 아래로 보이는 영이의 얼굴. 인력거는 백기를 태우고 달렸다. 옆에 앉은 안영이는 나직히 입을 열었다. 이 번 거사는 성공이라고. 수고 많았다는. 성공이라뇨. 돈은… 모조리 뺏겼습니다. 죄책감에 고개를 들지 못했던 백기는 그녀의 반짝이는 눈을 마주했다. 



그녀는 간략하게 그 날 있었던 일들을 설명해주었다. 



사실 그 열차 안에는 총기 조립도와 폭탄의 재료를 갖고 있는 자가 타고 있었다. 국외에서만 투쟁을 하는 것은 사실 상 쉬운 길만 걷는 것이라며, 국내 투쟁도 병행 해야 한다는 오 대장의 신념으로, 국내에도 꽤 수가 되는 조직원들이 정체를 숨긴 채 활동을 하고 있다. 최종 지시를 내리는 오 대장이 서간도에 있기 때문에, 때로는 직접 명령을 내릴 사람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 명령에 따라 만주에서 조선으로 돌아온 것이 바로 백기고, 그 총기는. 



경비가 삼엄해 쉽사리 폭탄과 총기를 수입해오지 못하는 관계로 재료 및 조립도가 필요했고, 그 것 또한 국내 반입이 어려울 지 몰라 역 내에서 소란이 필요했다는 사실. 아니, 소란이 아니라. 온 경비의 이목을 집중 시킬 수 있는. 그래서 재료와 조립도를 지닌 자가 어떤 검문도 받지 않고 경성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하는. 그런 큰 미끼가 필요하다는 사실. 백기는 영이를 통해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장백기씨. 미끼, 꼬리…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저는 할 말이 없어요. 그러나, “ 


깊게 숨을 내쉬는 영이는 곧 말을 이었다. 



“우리에게 크고 작은 일이 중요 했던 가요. 그냥, 뭐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심정. 충분히 아시잖아요.” 

“...그게 아니라, 후우. 알아요. 저도. 다 아는데, 이해도 하고. 저 또한 그런 마음으로 이 일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꼬리였단걸 알았더라면...” 


성공 시키지 못했단 죄책감이, 눈을 떴을 때 손에 들려있어야 할 돈 가방은 사라지고, 어두움 속에서- 찬 시멘트 바닥 위에서 느꼈던 그 죄책감- 조직에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하고 민폐만 끼쳤다는 이 두려움이. 내 목을 조르진 않았을거라구요. 



“다 이해해요. 백기씨.” 

“......” 

“백기씨에게 자금을 전달하기로 했던 분은 조직 차원에서 또 다른 명령이 곧 내려올 겁니다.” 

“......” 

“사람을 잃으면 투쟁도 잃는다. 오 대장님 철칙이시잖아요. 우리, 조금만 더 믿어요.” 



인력거꾼은 백기를 내렸던 곳으로 다시 몸을 향했다. 둘의 대화가 끝이 날 때 까지 어디에도 정차하지 못하고 발걸음을 옮겼던 인력거꾼은 조금 벅찬 지 그 속도가 느려졌다. 영이가 전해준 종이 위에는 손으로 그린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이왕 조선에 오게 된 것, 큰 소동으로 만주 땅에 건너오는 것도 힘들 신분임을 고려해 백기는 당분간 조선에 머무르기로 했다. 



만주는 오상식 대장 처럼 비슷한 뜻을 가진 몇 개의 군 부대가 한 데 모이자는 이야기가 오고 가는 상황이며, 그 곳 상황이 정리될 때 까지 백기는 조선에 머무르며 활동할 것이다. 영이가 전해준 지도는 그들의 아지트. 이 곳에서 반입된 총기 조립도를 골자로 한 총기가 만들어질 것이며, 게릴라 전략을 짤 것이다. 그리고 폭탄과 총기가 완성되는 대로 전략 수정을 한 후, 직접 뛰어들 것이다. 물론 그 전에 만주에서 다시 절 부르면 가야겠지만. 



조선에서 활동하기로 한 약속은, 애초 간도로 떠날 때와의 마음가짐과는 조금 다른 사실이기 때문에 영이가 전달하는 말에 주저했던 것도 사실. 허나 좀 전의 대화 처럼, 어떤 일이든 조국을 위한 일은 가치가 있음을 알기에 백기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끄덕인 또 하나의 이유. 




“백기야!” 



아차, 내가 나갔다 온단 말을 했던가. 


인력거가 멈추고 땅에 발을 딛자마자 골목 앞까지 나와 있던 그래가 발을 총총거리며 백기에게 다가왔다. 마당을 쓸겠다며 나간 백기가, 한 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 밖으로 나왔더니 기다렸던 백기는 온데간데 없고 백기의 온기가 남아있는 빗자루 만이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 황당함과 동시에 아직 다 아물지 못한 상처를 안고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하는 불안함이 한데 휩싸여 그래는 골목 어귀를 어슬렁거릴 수 밖에 없었다. 



“저.. 백기씨?” 


불안함에 떨고 있는 두 눈을 차마 볼 수 없어 그냥 품에 안아버린 백기는 한 참을 그래 머리만 쓰다듬다 뒤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그래를 놓아주었다. 뒤 돌아선 곳엔 영이가 여직 떠나지 못하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제 정신 좀 봐. 조심히 가시란 인사도 못 드렸네요.” 


은은하게 미소짓는 영이는 그래를 흘끔 보더니 백기에게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 이 쪽은 안영이씨. ” 

“반가워요.” 

“그리고 이 쪽은……” 

“백기 친ㄱ..” 

“제 동거인 입니다.장 그래” 



말 끝을 흐리는 백기가 혹여나 곤란할까. 먼저 입을 뗀 그래의 목소리는 그 것보다 더 크고 또렷하게 저와의 관계를 밝히는 백기에게 저지당했다.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고 있는 영이는 난감하게 웃고 만 있는 그래의 한 손을 쥐곤 흔들었다. 



“백기씨한테는 그냥 조선에 있는 편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래, 조선에서 활동하라는 명령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또 하나의 이유. 장 그래. 


‘가서 둥지나 지켜’ 


내 처마 위에 앉은 새는 내가 지켜야지. 벽을 타고 들어와 둥지를 위협하는 구렁이를 내쫓는 것은 내 몫이다. 




당분간 조선에 머무를거란 백기의 말에 그래는 말없이 백기의 품에 안겼다. 혹여나 아물지 못한 상처를 건들일까 마음껏 안기지도 못하는 어깨가 가여워 백기는 몸에 힘을 줘 그래를 결박했다. 백기의 품 속에서 ‘으으- 갑갑해’ 하고 웅얼 거리던 목소리는 이내 백기의 품 안에서 가장 따듯한 안식을 맞이한 듯 백기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영이를 만난 후로 백기는 부쩍 다시 바빠졌다. 몸을 회복할 시간을 갖긴 한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아픈 내색 하나 없는 백기는 그래가 잠에 깨기 전 몰래 입을 맞추고 나가서는 한 밤 중, 그 언젠가 편지를 쓰던 그래가 사랑을 전했던 북두칠성이 반짝일 쯤 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밥은 제 때 먹으며 돌아다니는 것인지 한 집에 살면서도 백기의 잦은 외출에 밥 한 번 같이 먹기 힘들어진 둘 사이. 그래는 혼자 이 집을 지키는 것이 맞는 것인지 고민이 들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백기와 살림을 합쳤을 때, 1년 간 가게의 문을 열지 않았다. 돌아가신 어머니와 독립 운동을 하겠다는 백기를 지원하느라 장사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 덕에 가게는 먼지에 쌓였다. 그렇다면 장사를 쉬던 1년 동안 무엇을 했던가. 백기를 내조한다는 명목 아래, 어머니를 그리워한다는 핑계로, 아무 것도 가꿔 놓은 것이 없었다. 몇 일 전, 매를 맞고 돌아와 쓰러진 백기의 참담한 모습을 보며 그래는 많은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그의 뒤를 지키는 것이 정말 그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지. 혹여나, 제 앞길조차 찾지 못하는 나의 이런 나약함이 그에게 짐이 되지 않을까. 어쩌면 백기가 없더라도, 나는 내가 갈 길을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 것이 훗날이라도 백기에게 짐이 되지 않을 방법임을 알기에 



“백기야. 나 다시 장사 하려고 하는데. 괜찮지?” 

“장사?” 

“응. 너도 집에 잘 없고- 혼자 있을 시간에 돈이라도 벌면 너한테도 도움이 되지 않..” 

“그냥 내 옆에 있어. 그게 날 도와주는 거야.” 



허나, 백기는 완고했다. 그래의 어깨를 붙잡은 두 손의 악력이 그의 완고함을 표현하고 있었다. 고통스레 인상을 찌푸리게 되는 그래. 



“네가 없으면?” 

“......없지 않아” 

“언제까지, 여기 있을지 모르잖아.” 



그래의 말은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 오 대장이 만주에서 부르는 날. 바로 이 곳을 떠날 것이며 그래 또한 그 것을 알고 있다. 뿐만 아니다. 어쩌면 지금 조선 땅에 남아 하고 있는 것들이. 매일 아침 해도 뜨기 전에 아지트를 향하는 발걸음이, 그 곳에 남긴 백기의 행적이 걸리는 날이 온다면- 그래는 저를 만주로 떠나보냈을 때 보다 더 지옥 같은 생활을 보낼지도 모른다. 옥에 갇힌 백기를 걱정하면서. 



허나, 지금은 함께 있으니. 지금만 바라봐줬으면 좋겠는 마음. 언제 다시 떠날지 모르는 내가 아니라 지금 옆에 있는 날 위해 나와 함께 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래의 여린 어깨를 쥔 두 손이 시큰거려왔다. 혹여나 나의 이런 부탁이 너에게는 강요로 느껴지는 것인지- 백기는 마음을 다 잡았다. 그래, 네가 원하는 것이 내가 원하는 일이니… … 헌데, 쉽사리 네 맘대로 하란 말을 꺼낼 수 없는 것은. 



‘ 네 처마에 둥지를 틀었다고 네가 주인은 아니지’ 

‘ 어린 새가 언제 커서 날개 짓을 할지 알고’ 

‘ 천하태평 해’ 



네가 날개짓을 하는 게 싫어. 




“하지 마.” 

“... … 왜?” 

“싫어. 그냥 내가 하지 말란 건 하지 마.” 


백기는 귀에 맴도는 그 목소리에 눈 앞에 있는 그래의 표정이 굳어가는 것 도 감지하지 못했다. 


“이유,를 말해줘. 안 그럼 할래.” 

“뭐?” 

“너 만주 가는 것. 거사 치루는 거. 내가 한 번이라도 말린 적 있어?” 

“......” 

“날 위한 일이라며. 그래서 꼭 해야 한다면서요. 그래서 나 당신 하고 싶은 일 하도록 나뒀어. 이번엔, 내가 하고 싶은 일 할래요. 나도, 나도 당신을 위한 거야.” 



그래는 제 어깨 위 백기의 손을 내려놓았다. 힘이 다 빠져버린 두 손은 그래의 움직임에 쉽게 손을 놓아버린다. 함께 살면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래의 그 모습이 얼을 잃은 백기. 함께 살면서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제 완고한 모습에, 조금 흥분해 심장이 빨라진 그래는 뒤를 돌았다. 장사를, 장사를 해야 해. 하루라도 빨리. 언제 떠날 지 모를 백기를 위해서. 언제 그의 짐이 될 지 모르는 날을 위해서. 



“한 석율. 그 사람이 네 얘길 하더라” 

“......” 

“나 없는 동안 꾸준히 너랑 같이 있던 모양이던데...” 

“......” 

“정말, 날 위한 거 맞아? 장 그래.” 


뒤를 돌은 그래는 한참을 아무 말 없었다. 









+)
 




한 테이블,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내가 타자기 위로 시선을 주고받는다. 어두운 실내 안 머리 위에 매달린 조명 아래 두 사내의 눈빛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다. 핏물이 메말라 얼룩이 거뭇거뭇한 옷을 입은 사내는 등을 빳빳하게 세운 채 맞은편의 사내를 마주 봤다. 그 맞은 편의 사내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연신 얼굴에 미소를 지워내지 못한다. 타닥타닥, 양복 입은 사내의 열 손가락이 가볍게 춤을 추듯 타자기를 눌러댔다. 그 소음에 실내의 정적이 깨진다. 타자기의 소리는 공간을 울리고 습한 공기의 지하실은 두 사내의 기 싸움으로 바싹 말라가고 있다.





“이름”

“장 백기”

“나이”

“스물일곱”





뭐, 자세한 거야 이미 대충 들어서 알고 있고 총독부 리스트에도 올라와 있는 사람이 좀 조심하지 그랬어. 석율은 입 안의 혀를 찼다. 눈 앞의 남자를 증오 가득 찬 시선으로 노려보는 백기의 장단에 맞춰 함께 노려봐 줬다. 아직 그렇게 째려보긴 이른데 말이야. 백기는 한껏 여유로운 저 놈의 면상을 갈기고 싶은 충동이 꿈틀거렸다. 허리를 치켜세우고 노려보는 데에만 해도 온 에너지를 써버릴 수 밖에 없는 제 처지가 안타까웠다. 온 몸이 쑤셔왔다. 낮에, 경성에서 순사들을 피해 도망치면서 맞았던 자리가 욱씬 거린다.





“누가 시켰어”

“무엇을 말입니까”

“돈, 누가 보낸거냐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쉽게 대답할 리가 없지. 매번 비슷한 양상이다. 독립군이랍시고 테러를 감행하거나 뒷돈을 마련하는 자들을 심문할 때 마다 보는 시나리오. 오리발을 내미는 저 단어들이 낯설 것도 없었다.





“오상식 그 인간은 잘 지내고?”

“....뭐라고?”





네가 입을 닫는다고 한들 아무 것도 모르고 맹하니 네 뒤만 쫒고있을 내가 아니지. 백기가 체포되기 이전, 이미 자금 거래가 이뤄질 것을 예측하고 그 끝에 오상식이 있다는 단서까지 잡아낸 석율이었다. 석율은 적잔히 당황해 흔들리는 백기의 동공을 직시했다. 주먹을 줬다 폈다 꼼지락대는 두 주먹이 우스워졌다. 미묘하게 꿈틀대는 미간이 움직임을 멈추고, 백기가 입을 열었다.



“다 알면서 물어보는 이유는 뭡니까”





입가의 미소와 함께 콧바람을 내뱉으며 그를 비웃는 석율이 책상 위에 턱을 받치고 장백기를 관찰한다. 장그래 만큼이나 잡티하나 없이 매끄러운 피부가 만주의 거친 바람을 맞았을 것이라곤 상상하기 어렵다. 남자다운 턱선과 그 턱을 움직여 내뱉는 목소리가 청아하면서도 남자답고 우직했다. 반면 석율을 향한 눈은 왼쪽과 오른쪽이 모양새가 살짝 다르면서도 서늘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장난 좀 쳐봤어”





석율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무섭게 백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깊은 숨을 분노와 함께 거칠게 몰아내쉰다. 자신은 목숨을 걸고 이 자리에 앉아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연인 장그래를 위해 조선을 떠났고 다시 조선 땅을 밟았다. 그 걸음 하나하나에 내 목숨이, 연인이, 조국이 걸려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조심스러웠다. 혹여나 그 걸음하나가 삐끗해버리면 목숨이 위험해질 수 도 있는 일 투성이였다. 조선 땅에 제 존재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숨통을 조이는 시선이 많았다. 총독부에서는 이따금 감시를 붙여와 발을 묶었고 연이어 투사동지들의 체포소식이 백기의 신념을 푹푹 쑤셔왔다. 겁도 났다. 이대로 일본경찰에게 걸려 고문을 받는다면 얼마나 괴로울까. 간도의 땅에서 찬바람과 함께 훈련을 받을 때에도 그들의 잔인하고도 비인격적인 수많은 고문방법들이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모진 고문으로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까지 엄습했다. 허나 그럼에도 운동을 멈출 수 없었던 것은 땅땅 얼은 조국의 봄을 되찾아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봄으로 인해, 그래가 한 번이라도 더 웃길 바랬다. 비록, 그래와 몸은 떨어져있다 하더라도 독립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정답이라 믿었다. 그런데, 제 앞의 남자는 그런 자신의 신념에 장난을 치고 있다. 발각될까 졸이는 마음에 난도질을 하며 농락하고 있다. 같은 조선인 주제에 일본의 힘을 등에 없고 자신을 멸시한다. 백기의 꽉 물린 어금니가 으깨질 듯 아파온다. 두 손이 주체하지 못하고 부들거렸다. 백기는 그의 장난을 응대할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취조가 다 끝난 것이라면 어서 옥으로 보내시지요”

“형무소에 가서 모진 고문을 견딜 수 있겠나?”

“견뎌야지요. 그 것이 제 일입니다.”




“그럼 장그래는?”





석율의 입에서 나온 연인의 이름에, 백기는 자신이 지금 앉아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서 있었더라면 힘이 풀린 두 다리가 본분을 잊고 저를 주저 앉힐지 모른다. 저 자가 그래를 어찌 안단 말인가. 백기의 동공이 흔들렸다. 어둠 속에서 저 남자는 태연하게 장그래의 이름을 입에 올린다. 그 어투를 보았을 때, 그래와 제 관계를 이미 한참 전에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말없이, 생사도 알 수 없는 제 연인을 옥바라지 하는게 장 그래 일이야?”

“당신이 장 그래를 어떻게 알아.”



그래 요리 솜씨가 좋더라고.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 지금 네 둥지에 있는 어린 새가 언제 너희 집을 떠날 지 모른다는 소리를 하고 있는데. 


“ 독립 운동, 좋아. 폭탄을 터뜨리든 옥에 갇히든 뭘 하든 너 맘대로 해. 근데, 그 때까지 장그래가 네 옆에 있을거라 자만 하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