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새를 위하여 13
웬만한 조선 사내의 어깨만치에 키가 닿을 만큼 훤칠한 키, 가느다란 목선과 찰흙을 빚은 듯 동그란 머리. 동그란 볼 살과 하이얀 피부 위로 짙은 색의 화장. 그녀는 어디를 가던 온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 시키는 모던걸이다. 맑은 옥색의 양장과 청록색의 리본이 달린 모자를 머리 위에 얹은 그녀가 또각 또각 구두 소리를 내며 총독부 건물에 발을 들였다.
“어허, 안영이”
“오랜만이야”
그녀의 발걸음이 다다른 곳에는 그녀의 오랜 친구 한석율이 있었다.
본가에 갔더니 독립 했다더라. 집 주소 받긴 했는데, 다 큰 처녀가 사내 혼자 사는 집에 들락거리는 것도 웃기고. 그냥 바로 총독부로 왔어. 여긴 어쩐 일이냐는 석율의 물음에 영이는 입술을 가늘게 늘리더니 대답했다. 제 집으로 찾아올 수 없는 이유를 말하는 건조한 목소리에 석율은 기가 찼다.
“그게 걱정되는 애가, 총독부를 와?”
“왜, 뭐 어때서.”
네가 하고 다니는 짓을 몰라서 그래? 말문이 턱 막혀버린 석율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눈 앞에서 뻔뻔히 고개를 갸우뚱 하는 몸 놀림이 기가 막혀 헛, 체- 공기 빠지는 소리가 나오길 몇 차례. 결국 그는 옷걸이에 걸려있는 겉옷을 빼내 들고, 그녀를 끌고 선 총독부 건물 밖으로 나왔다.
얌전히 석율의 뒤를 쫓아 나온 그녀는 그와 나란히 발을 맞춰 걸었다. 고운 모래가 깔린 바닥에 터벅터벅 두 개의 발 걸음이 조용히 계속되고, 둘은 한참을 서로 말이 없었다. 큰 도로 위로 지나가는 전차가 서너 대가 지나 갔을 때가 돼서 야 석율이 짜증스럽게 앞머리를 헝클어드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함부로 찾아오지 마.”
“왜”
“알면서 물어?”
여전히 뻔뻔하게 안그래도 큰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석율을 쳐다보는 그 모습이 다시 한 번 석율의 발걸음을 휙 돌리게 했다. 갈색 구두가 작은 먼지 바람을 일으킨다.
“내가 걱정되는 거야, 네가 걱정되는 거야?”
그러나 먼저 말문을 튼 것은 영이가 먼저였다. 좀 전까지 장난기 섞인 검은 눈동자는 사라져버리고 이내 진중하게 물음을 건네는 그녀의 눈빛에 석율의 앞머리가 또 한번 헝클어졌다. 실컷 인상을 쓴 채 쳐다본 하늘, 태양이 너무 뜨거워 석율은 저절로 오른 손을 눈썹가로 가져갔다.
십 여년 넘게 보아온 영이의 대화법이다. 눈을 똥그랗게 뜨고 온갖 장난 섞인 말로 상대방을 골려주다, 상대가 방심을 할 참에 펀치를 훅 날려버리는. 그리고 석율은, 그 것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오랜만에 본 탓인지 아마 면역이 조금 약해졌나 보다. 그녀가 상해로 간다고 선언한 이후로는 처음이었으니까.
“내가 너한테 들은 이야기들 다 보고라도 할지 어찌 알고.”
“내가 잡히면 너도 사실 한 통속 이였다고 거짓말할지 어찌 알고.”
갑갑함에 석율이 넥타이 매듭을 조금 느슨히 푸르자 때 마침 불어온 옅은 바람이 석율의 목 뒤를 간지럽혔다. 시세(時勢)의 끝과 끝에 서 있는 그들. 서로 나란히 서서 걸음을 옮기며, 잠시 나마 둘 사이의 간격은 잊혀진다. 허나 여전히 그들은 극과 극에 서 있기에 함께 있어도 공존 할 수 없는 것일까.
“이제 반항 그만 할 때도 됐어. 안영이. 부모님한테 죄 짓는 거다.”
“내가 죄를 짓는 게 아니라 부모가 나라에 진 빚 대신 갚는거란다. 친구야.”
조선 땅을 통 틀어 그 갯수가 열 개 안쪽인 여자보통학교를 다니던 안영이는, 웬만큼 똑똑한 사내들도 견디기 힘든 동경유학의 길에 올라섰다. 물론, 그 뒤에는 그녀 집안의 탄탄한 재력이 자리잡고 있었지만. 어쨌든, 석율의 집안과는 마찬가지로 그녀의 아비 또한 총독부에 쇳가루를 받아가며 부를 키워왔다. 그녀의 아버지는 조선인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부자였다. 어디가서 절댁 기가 죽지 않을 만큼의 부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들보다 하대당하는 것을 끔찍해한 그녀의 아버지는, 영이가 보통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그녀를 동경으로 유학 보내버렸다.
정말 안타까운 것은-물론, 그녀의 아버지 입장에서- 기껏 보낸 동경에서 그녀가 배워온 것은 사회주의나 민주주의 그리고 일제 권력의 부당함 같은 것들 이라는 사실이다. 경제학을 전공하라는 아버지의 지시에 반항하듯 철학 공부를 시작한 그녀는 공자, 맹자와 같은 동양 사상은 물론이거니와 칸트, 데카르트 등 서양 철학에 이르기 까지 온갖 사상을 배워가며 현실의 부조리를 깨우쳤다.
석율의 입장에서 그녀는 꽤나 돌연변이 였다. 동급생이 생겼다는 소식에 기뻐했던 첫 만남과는 달리 그녀는 점차 석율에게 독립이니 자본주의니 하는 것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분명, 유학 초반 친구 관계를 맺었을 때만 해도 그러지 않았다. 둘은 험난하고 외로운 유학 생활의 유일한 버팀목이나 마찬가지였다. 거리에서 일본인에게 욕지거리를 들을 때도, 거나하게 취하고 싶을 때도 시험 기간이 되어 떡진 머리를 하고 밤을 샐 때도 둘은 함께였다. 허나, 같은 조선인 무리 중에 몇몇 학생들이 꾸린 문학 소모임에 참여하면서 부터 영이가 변하기 시작했다.
영이와 그 무리는 함께 시를 쓰고 합평을 했다. 한국의 문학 잡지를 구해다가 돌려 읽으며 시와 소설들에 대한 견해를 나누며 견지를 넓혔다. 시와 소설을 읽는 모임은 인문학 모임으로 변모했고, 그들은 저절로 조선의 현 상황에 눈을 떴다.
조선인들이 책을 읽는다고 모여서는 조선 땅의 시세를 논한다는 것은 유학생들 사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때문에 석율도 그녀가 변한 이유를 알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허나, 그럼에도 둘의 관계가 지금까지 유지될 수 있는 것은.
"다음 주에 가족 모임 꼭 오라네, 늬 아버지께서"
여전히 일제 세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그들의 아버지와, 반대로 암암리에 독립 운동에 매진하는 영이, 그리고 그 것을 묵인해주는 석율이 있기 때문이다.
동경 대학교의 졸업이 나가올 쯤에, 석율은 고시 준비에 열을 올렸고, 영이는 조선이 아닌 상해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상해에 갈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석율은 소식을 듣자마자 그녀를 쫓아가 따졌다. 친일파 자식 새끼가 거기가 어딘 줄 알고 가. 영이의 태도는 석율이 진우를 상기하기에, 그리고 떠나는 진우 앞에서 무기력해질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을 상기하기에 너무 적절했다.
한석율, 나 잃기 싫으면 앞으로 입 단속 잘 해줘.
그녀는 그렇게 그의 입에 자물쇠를 채웠다. ‘나를 잃기 싫으면’ 이라는 한 가지의 가정은 석율을 무너뜨렸던 가슴 속 문드러진 상처를 칼로 헤집어 놓는 것 이었다. 같은 이유로 이미 한 사람을 잃은 경험이 있었다. 그 때 진우는, 석율을 혐오스럽다고 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지금, 영이가 석율에게 말한다. ‘내가 널 혐오하지 않게 해줘.’ 석율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약점을 쥐고 흔드는 그녀의 강단있는 말에 고개를 끄덕인 석율은 그 날 이후, 심지어 석율이 총독부에 발령을 받고 나서도 영이의 어떤 ‘활동’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절대 입밖에 꺼내지 않았다.
똑똑한 안영이는 그 것을 적당히 활용할 줄 알았다. 제 비밀을 알고 있는 석율 앞에서 뻔뻔하게 친일파 행세를 했다. 오늘처럼 당당히 총독부 건물을 들락거렸고, 석율의 가족과 함께 하는 저녁 식사에서 아버지들과 정세에 관한 토론도 했다.
“됐어. 안 가”
“누구 맘대로. 그 지옥 불에 너라도 함께 해야 하지 않겠나. 친구”
“그 노인네랑 말 섞기도 싫어.”
“어허- 이 친구”
넌 가끔 보면, 나보다 더- 친일 행세 하는 놈들 싫어하는 것 같아. 동족 혐오 뭐 그런 건가.
석율은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또 한번 미간을 좁혔다. 그 작은 변화를 감지해 낸 영이가 제 어깨로 석율을 툭툭 치며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를 뱉어낸다. 야, 어디가- 오늘 따라 유독 시끄러운 영이가 뱉는 말 족족 헛소리라 짜증을 유발하다 가도, 재잘 대는 도톰한 입술이 귀여워 석율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래는 가게의 문을 다시 열었다. 지난 며칠 사이 헛걸음을 했던 손님들이 반가운 소리를 뱉었다. 몇 몇은 장사를 못할꺼면 문 앞에 써 붙이기라도 하지 그랬냐며 핀잔을 줬다. 그래는 그제서야 아차 싶었다. 가게를 열거라고 그렇게 고집을 부려놓고선, 정작 해야 할 일은 백기에게 정신이 팔려 손에 잡히지 가 않았었다.
큰 일이 있지 않는 이상, 백기는 그래와 함께 가게 일을 돌봤다. 푸줏간 주인이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지난 일주일 간 배달할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덕분에 고기를 사다 나르는 일은 백기의 몫이 되었다. 무거운 짐들을 옮기는 일 뿐 아니라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손님을 상대하는 일 까지, 그래가 그럴 필요 없다고 말림에도 백기는 모든 궂은 일을 도맡았다. 장사를 마치고 집에 오면 피곤했을 그래의 어깨를 두툼한 손으로 주물러주었다.
여느 때와 같이, 어쩌면 백기가 만주로 떠나기 전의 날들과 같이- 평화로운 날들의 연속이었다. 둘은, 서로 뾰족한 말을 내뱉었던 그 날에 대해선 금기처럼 입에 올리지 않았다. 깊은 호수 위 자리 잡은 얇은 얼음 막을 굳이 밟을 필요는 없었으므로.
그래는 가끔 석율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왜 슬퍼 보였을까. 그는 왜, 나를 그렇게 물기 어린 눈으로 쳐다봤던 것일까. 네 눈이 날 불렀잖아. 일렁이는 목소리가 귀에 박히고 마지막으로 그를 봤던 그 아침 저를 차 한 면에 가둬 둔 채 나눴던 폭력적인 입맞춤. 그의 입 속에 머물렀던 공기가, 아직도 그래의 입 안쪽에서 빠져 나오지를 못한다. 그래는 볼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였다. 더는 석율의 생각을 하고 싶지도 할 수 도 없었다. 부푼 볼을 톡톡 두들기며 ‘귀여워’ 속삭이는 백기가, 연인이 곁에 있다. 언제 깨질 평화일지는 몰라도- 그래는 그와의 행복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백기가 볼을 간지럽히면 시선을 둘 곳 없이 멍하니 서 있던 그래가 눈을 몇 번 깜박이곤 백기를 쳐다보았다. 그에게 사랑스럽게, 사랑 받고 싶은 미소를 보여 주었다. 내가 그 자를 불렀다고. 한석율은 뭔가 대단히 착각한 모양이다- 그래는 그렇게 되내였다. 자신을 거칠게 밀어 대면서도 입 안을 휘저었던 그 부드러운 움직임은, 그의 착각이다.
오직 이런 생각에만 휩싸여 있던 그래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단정한 자태를 보며
“어서오…”
그를 다시 보면 어떻게 그의 얼굴을 봐야할 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음에도 주문을 받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주방 안에서 식기를 정리하고 있던 백기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가게 한 가운데에 당황한 기세가 열렬한 장그래와 그 맞은 편, 그를 당황시킨 장본인. 한석율을 발견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얼굴이다. 간까지 떨릴 정도로 막대한 임무를 등에 맨 백기를 '장난'이란 단어 하나로 조롱했으며, 그래와 자신의 사이를 시험하고, 둘을 둘러쌓고 있던 단단한 벽돌을 주먹 한 방으로 금 가게 만들었던 존재. 저를 짓밟아 누르고 이죽거리며 장그래를 운운했던 입. 백기의 흰 얼굴이 종이작 처럼 구겨져버렸다.
"안영이씨?"
그러나, 석율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또 다른 한 사람에 백기 역시 당황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어, 백기씨. 그래씨도 있네요"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는 그래와 그런 그의 어깨를 누구에게도 뺏길 수 없다는 듯 힘껏 움켜쥐고 있는 백기. 그리고 식탁에 앉아 그런 둘을 쏘아보며 한껏 무게를 잡고 있는 석율과는 다르게.
"그래씨, 음식 솜씨 좋은데요"
해맑은 영이의 목소리 뒤로 그릇과 숟가락이 요란스럽게 부딪친다.
"당신 뭡니까."
"안영인데요"
그릇을 들어 국물까지 한 입에 털어 넣은 영이가 캬- 하고 시원한 소리를 내뱉는데, 백기가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대체 왜 안영이가 석율과 함께 이 곳을 찾아온 것일까. 석율을 따라 들어온 영이는 분명 백기에게 상식이 꾸민 사건의 전말을 전달하며 그를 위로했던 그 안영이가 맞았다. 분명 상식의 수하로서, 자신에게 곧 다가올 새 임무를 기다리라고 말했던 그녀인데 대체 그녀가 왜.
"아, 내가 왜 한석율이랑 같이 있는지 물은 거에요?"
"......"
"동경 유학 가서 만난 절친한 친구에요. 가족들끼리도 꽤 친분이 있구요."
"가족들?"
"아, 내가 말 안했었구나. 우리 아버지가 유통 업계에서 꽤 손 꼽히거든요. 아버지들 끼리는 사업끼리 만나셨다가 지금은 종종 가족 모임도 있을 정도로 사이가 좋으시죠."
적개심으로 단단하게 굳어진 표정의 백기는 여전히 영이를 의문의 얼굴로 쳐다보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 변절, 밀고 이런 거 소질 없으니까"
"......"
"근데 석율이랑 두 분은 어떻게 아시는건가?"
"다 먹었으면 일어나. 가자"
"....아, 알 수 밖에 없구나"
주머니에서 양담배를 꺼내든 석율이 영이를 잡아끌었지만 이미 세 사람의 관계 파악을 끝낸 영이의 말을 막을 수는 없었다. 더는 들을 수 없다는 듯 담배를 입에 물고 자리를 박차고 나온 석율. 그리고 영이는 아랑곳 않고 백기에게 말을 이었다.
"한 석율. 나쁜 새끼는 맞는데 그래도 불쌍한 놈이에요."
"총독부 아래서 호가호위 하는 새끼가 뭐가 불쌍합니까."
"음...석율이가 제 정체를 알고도 입 닫아주니까 제가 이렇게 친일파 행세 하면서 백기씨 볼 수 있는 거 아니겠어요? 두 분이 안 좋은 감정 있을거란거 알지만... 그래도, 제 앞에서는 좀 만 이해해주세요. 제가 한석율 이용해 먹는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맛있는거 먹게 해준 대서 따라 왔더니, 그래씨 가게 였네요. 잘 먹었습니다. 종종 들릴게요. 눈썹을 찡긋하며 인사를 건네는 영이와, 여전히 상황 파악이 힘들어 어리둥절한 그래. 그리고 아직도 의심의 눈초리를 지우지 못하는 백기가 자리를 뜨려는 영이의 팔을 잡아 챘다.
안영이씨. 믿습니다.
영이는 대답 없이 은은한 미소만을 남겨주었다. 믿으세요, 저를 그리고 한석율도.
+)
소란 아닌 소란을 남긴 석율과 영이가 떠난 자리. 남아있는 백기와 그래를 둘러 싼 것은 오직 정적 뿐 이였다. 서로, 다른 생각으로 바빴기 때문이다.
안영이가 정말 내 동지가 맞는 것일까. 그녀를 믿고 따라도 되는 것일까. 상식은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녀가 조직에 몸 담는 것을 허락한 것일까. 백기의 머리 속을 어지럽히는 영이에 대한 온갖 의문들. 설마, 혹시 한석율도… 그러나, 이내 ‘혹시’라는 생각은 멈춰버렸다. 저를 비웃는 그 이죽거림은 그의 피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것이다.
이런 백기의 복잡한 머리와는 다르게 그래의 머릿속은 단 한 가지의 생각만이 그를 지배했다. 한석율. 말 한마디 없이 식사를 마치고 떠난 그의 자리가, 이상하게도 여전히 그의 온기로 가득 찬 것만 같다. 그와 다시 만나게 된다면, 분명 첫 만남처럼 그래를 비웃고 조롱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다시 본 그의 눈빛은.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꽁꽁 언 두 눈동자로 자신을 쳐다보았지만, 그래는 왠지 그 눈빛이 그 새벽 밤의 눈 처럼 슬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