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백기그래] 다이아몬드

초록치마 2015. 4. 16. 22:51

 






우리 학교 운동장은 초록철조망으로 분리된 공간이 있다. 네모난 그 공간 속에서 깊게 모자로 햇빛을 가린 아이들이 공간을 던진다. 크지 않은 시설 때문에 다이아몬드 모양의 운동장은 아이들의 큰 꿈이 됐다. 모의고사 날. 장백기는 나에게 오엠알 카드를 맡기곤 짐을 챙겨나갔다. 장백기가 간 곳엔 아마 백기처럼 누군가에게 오엠알카드를 맡기고 간 녀석들이 모여있을 것이다. 점심시간 이후 3교시 외국어영역 시간을 알리는 예비종이 울리면 나는 운동장에 나가있는 장백기가 조금 부러웠다. 창 밖에서 몰아치는 햇살이 눈을 간지럽혀서 시험지도 볼 수 없다. 나는 넋을 놓고 창 밖을 쳐다보았다. 운동장 안, 그것도 한 구석 철조망 안으로 남색모자를 맞춰 쓴 녀석들이 열심히 움직인다. 우리학교에는 야구부가 있다. 










다이아몬드 
w. 초록치마







찌는 여름. 기말고사가 끝나고 하릴없이 교실에 삼삼오오 모여 방학만을 기다리고 있다. 기말고사가 끝났는데도 진도타령을 하며 책을 펴라 소리를 질러대는 수학선생님을 무시한 채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망할 교장은 나라에서 공문이 내려왔다며 방학 전까지는 절대로 에어컨을 틀어주지 않겠다는 엄포를 놓았다. 덕분에 선풍기는 윙윙 돌아가고 책상 위의 가정통지서는 나부껴댄다. 더위에 한껏 지친 사내새끼들은 교복 상의를 벗어던지고 흰 반팔 하나만 걸친 채 책상에 엎어져 코 골기 바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학은 열심히 목소리를 내고 있다. 


으- 지겨워. 앞자리 한석율이 뒤돌아 책상을 내 톡톡 쳐댄다. 뒤돌아 앉아있는 한석율에게 나직하게 일렀다. 공부해, 새끼야. 사방팔방 돌아다니며 주둥이 털기 바쁜 한석율은 이 여름이 힘겹지도 않은건지 제 더위를 다 팔아버린 모양새로 여기저기 들쑤시기 바빴다. 아마, 오늘 타겟은 난가보다. 장 그래, 운동장에 꿀단지라도 숨겨놨어? 저새낀 내 앞에 앉아서 눈이 뒷통수에도 달렸나. 언제부터 창 밖만 쳐다보고 있는지 아냐며 너야말로 공부나 하라고 실실 쪼갠다. 사실, 다른 애들처럼 나 또한 교탁 앞에 서있는 수학선생님의 목소리가 왕왕 거리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창 밖에서 팅팅 울리는 야구공의 배팅소리 때문이겠지. 


8월 달에 있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준비로 우리 학교 야구부는 학생들이 등교하기 전인 7시부터 소집된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숙소랍시고 마련된 컨테이너박스 안에서 합숙생활을 한다. 한 번은, 호기심에 그 안에를 슬쩍 들여다봤는데 사내새끼들이 모여사는 공간이라는 티를 풀풀 내듯 걸레가 썩어가는 냄새가 코를 쑤셔왔다. 그 이후로 그 컨테이너 박스 근처에는 얼씬도 않는다. 쨌든, 야구부는 이른 아침부터 일반 학생들의 등교소리를 들으며 열심히 공을 쳐대고 달리고 내던진다. 그리고 게 중에는 내 짝 장백기도 있다. 


장백기- 나 외로워. 문자를 보내봐도 답은 없다. 그닥 섭섭하진 않다. 유리창 밖 넘어로 감독이 내던지는 공을 받느라 온 몸이 흙투성이가 된 꼴이 다 보이니. 허나 40명이 꽉꽉 찬 이 교실에서 유일하게 내 옆자리만 텅, 하고 비어있다는 사실은 여름임에도 내 한쪽 팔을 조금 쌀쌀하게 한다. 우씨, 남들은 제 짝이랑 노느라 정신없는데. 자리를 비운 장백기를 탓하는건지, 1학기 내내 자리를 바꿔주지 않는 담임을 탓하는건지 모르겠지만 입이 자꾸만 삐죽삐죽 거린다. 제 짝과 짤짤이 하느라 바쁜 한석율은 이젠 날 귀찮게 하지도 않는다. 책상에 한 쪽 팔을 베고 엎드렸다. 그냥 바람이나 불어라. 


학교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파했다. 천지개벽에도 9시 야간자습을 꿋꿋이 시킬 것처럼 굴더니, 더위 먹은 학생들 앞에서는 별 수 없나보다. 기말고사 이후 담임은 오후수업을 끝으로 종례를 하러 들어온다. 석식을 먹지 않고 집에 가면 해가 뜬 길을 걸으며 하교를 할 수 있다. 해를 보며 집에 가본게 언젠지- 고등학교 입학 이후로는 참 낯선 이 풍경에 일찍 집에 간다고 어깨가 들떠버렸다. 학교가 일찍 파하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장백기에게는 여전히 답이 없다. 다시 한 번 문자를 보냈다. 야, 이제 우리 야자안해. 나 먼저가? 물론 답이 바로 오지 않을거란건 알고 있다. 아쉽다. 입맛을 쩝쩝 다셨다. 장백기랑 환한 해가 뜬 골목을 걸은 적이 있었던가? 


종례를 마친 담임이 교실을 나가마자마자 입을 틀어막고 있던 아이들이 왁자지껄 떠들어대며 교실을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아이들의 목소리와 나무 바닥에 책걸상이 끌리는 소리가 귓가를 괴롭힌다. 아랑곳 않고 다시 책상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좀만, 있다가. 더위가 한 풀 꺾이면 그 때 가야지...... 어깨를 붙잡고 깨우려드는 한석율을 한 손을 휙휙- 저어가며 쫒아내버리고 아이들이 모두 떠나 정적만이 남은 교실을 내 숨소리로 채웠다. 여전히 선풍기는 삐거덕거리며 돌아가지만, 아까처럼 나부끼는 종이들은 아이들 가방 속으로 사라진지 오래다. 


엎드리고 눈을 감으니 온 세상이 검다. 귓가에는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만 맴돌고 간간히 창밖 운동장에서 배트가 공을 치며 팅팅 거리는 소리만 들려온다. 아이들이 사라지고 나만 남은 공간. 더위도 열기도 점차 식어가고 귓가를 맴돌던 소리들도 점차 아늑해져간다. 감은 눈 위, 검은 세상들이 포물선을 그리더니 파도를 치고 줄줄이 밀려들어온다. 그 움직임에 시선을 맡기자 온 몸이 노곤노곤해진다. 툭- 하고 한 쪽 팔이 책상 밑으로 힘을 잃고 떨어졌지만 몸을 다시 움직일 힘도 없다. 아마,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나보다. 



“장그래. 일어나” 


나직한 목소리가 몽롱한 정신에 바람을 훅 하고 불어온다. 책상에 불이 붙어 데이기라도 한 듯 헐레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눈 앞에 장백기가 있다. 어- 백기이이- 잠에 취한 혀가 제 멋대로 움직이는지 말꼬리가 길어져버린다. 장백기는 씨익-하고 서늘한 눈을 접어 웃는다. 야구모자 아래로 보이는 두 눈이 새삼 잘생겼다. 내가 잠든 사이 백기가 짐을 챙겨놓았나보다. 한 손에 들린 가방을 내 어깨에 걸더니 복도에서 신발까지 챙겨온다. 크흐흐, 훈련 잘- 시켰네 생각하며 피식거리자 신발을 바닥에 내려놓느라 허리를 숙이고있던 장백기가 고개를 든다. 


“어쭈. 자는거 기다려줬더니” 


어쭈우-? 기다려준게 누군데에?! 내가 누굴 기다리다 잠들었는데! 억울한 마음에 눈썹이 나도 모르게 팍 치켜 올라간다. 찔리긴 하는 모양인지 장백기는 고른 치열을 드러내며 웃는다. 커다란 손으로 내 머리를 쓱쓱 문질러오는 그 손길에 기분이 좋아져 정강이를 차줘야지 하는 맘도 사라지고, 괘씸한 맘도 사라지고 마냥 무방비해져버린다. 아마 장백기 저놈은 그 걸 알고 이용해먹는게 확실하다. 이렇게 저에게 뿔이 조금 날라치면 내 머리에 제 손을 올려놓아버리니. 


이 시간까지 훈련을 한 것인지. 아니면, 감독님께 열차려라도 받고 온 것인지 백기는 여전히 흙과 땀에 젖어버린 유니폼을 입고 있다. 옆에 몸을 붙여 함께 걷는 백기의 몸에서 땀냄새가 폴폴 풍긴다. 땀 냄새 나. 저리가. 팔꿈치로 가슴팍을 폭폭 밀어내도 고때만 밀릴 뿐 다시 제자리. 내 옆에 몸을 붙이고 걷는 그 냄새가 조금은 포근한 것 같기도 하다. 


백기는 숙소에 들려 급한대로 흰 티와 회색 트레이닝복을 걸치고 나왔다. 훈련을 마치자마자 핸드폰을 꺼내 내 메시지를 보고는 아직 남아있을까 싶어 급한 마음에 옷도 갈아입지 않고, 계단을 성큼성큼 올랐다고 한다. 다행히, 난 아직 남아있었고- 물론 장백기를 기다리느라- 가슴을 쓸어내린 그는 내가 잠든 모습을 한참 내려다보다 조용히 내 가방을 챙겼나보다. 옷은 갈아입었지만 여전히 백기의 뒷목으로 땀이 송골송골 맺힌 것에 기분이 좋아졌다. 내 옆에 숨쉬는, 땀을 흘리는 장백기가 있다. 장백기는 야구를 하고 땀을 흘리고 그 체취를 퐁퐁 뿜는다. 내 코를 간질이는 그 체취는 요상하게도 나만 맡고 싶어지는 묘한 매력이 있다. 달달하기도 하고, 가끔은 물기를 머금어 청량하기도 하다. 얼마 전 한석율이 장백기 몸에 코를 들이밀고 킁킁대더니 이내 욕지거리를 내뱉는걸 봐선- 그 체취가 정말로 나만 맡을 수 있는 향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다행이지. 


평소, 야간자습이 끝나면 장백기는 훈련을 마치고 샤워를 하곤 교문 앞에 서 있는다. 야자를 마치고 신발주머니를 털레털레 흔들면서 교문으로 내려가면 장백기가 서있다. 우린 그럼 다시 나란히 몸을 붙이곤 집을 향한다. 물론, 우리 집. 숙소생활을 하는 장백기는 감독이 허락하는 날에만 집에 들어갈 수 있다. 이렇게 외출을 하는 것도 사실 혼날 일이지만 3학년 최고참이라는 핑계와 우리 학교 야구부 유일무이한 에이스 좌완투수라는 점을 앞세워 감독 눈을 피해 외출을 하곤 한다. 그렇게 15분 정도 어둑어둑한 골목길을 걷고나면 장백기는 별다른 말없이 그 큰 손을 높게 흔들어보이고는 다시 학교로 향했다. 그럼 난 그 큰 등짝이 점이될 때 까지 시멘트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는다. 오늘은 학교가 일찍 끝나는 바람에 교실에서부터 나란히 걸었다. 어둑한 것은 변함이 없지만 그래도 평소보단 조금은 이른 시간이었다. 그 손등과 내 손등의 이따금 스쳐지나간다. 큰 길이 있지만, 지름길이란 것을 핑계로 전봇대 하나 없는 골목길을 걸을때면 백기의 한쪽 팔과 나의 한쪽 팔이 오롯이 닿기도 한다. 길이 좁다. 


우리는 도란도란 이야기 꽃을 피웠다. 백기는 오늘 훈련을 이야기하고, 나는 한석율이 하룻동안 날 얼마나 괴롭혔나 주절주절 이야기를 푼다. 감독님이 펑고를 하는데, 아니 오늘 따라 공을 너무 빨리 던지는 거야. 그 것도 운동장 구석으로만. 자기도 못받을걸 던지면서 못받는다고 어찌나 혼내는지. 이것 봐 나 팔 다까졌어. 백기가 내밀어 보이는 팔 위로 살가죽이 살짝 벗겨져 붉은 기가 왕왕하다. 으, 아파. 다친건 백긴데도 내 팔이 아려서 미간을 찌풀이면 내 볼을 제 손가락으로 슥슥 훔치고는 다시 길을 걷는다. 오늘, 한석율이 지 짝이랑 짤짤이 하다가 걸렸는데- 아니, 자꾸 내 탓을 하는거야. 담임 왔는데 눈치도 안줬다구- 근데 그게 왜 내 잘못이야. 지가 못할 짓하다 걸려놓구선 그치? 그러게, 한석율이 잘못했네. 장백기는 내가 무슨 말을 하건 동조를 보낸다. 어떤 말이던 혼자 한참을 조잘조잘 거린 후 그치? 하고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면 하얀 얼굴이 나를 보며 입꼬리를 올리곤 그러게. 라고 나직하게 목소리를 뱉어낸다. 가끔은 그 목소리가 너무 좋아 나 스스로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정도로 한참을 중얼거리면 백기는 또 다시 큰 손으로 내 머릿결을 따라 뒷통수를 쓰다듬어준다. 가끔은 그 손길이 나에겐 없는 형처럼 느껴져 조용히 눈을 감고 그 온기를 느끼기도 한다. 


“경기 준비하느라 정신없겠네?” 
“응. 우승해야하니까” 

작년, 우리학교 야구부는 황금사자기와 청룡기 우승을 거머쥐었다. 올 해는 대통령배도 놓칠 수 없다며 아이들을 옥죄는 감독을 받아줄 수 있는 것은 아마 백기밖에 없는 듯 보였다. 백기가 입학한 이래로, 고교야구리그에서 야구부가 있는지도 몰랐던 우리학교의 존재감은 급부상하기 시작했고 작년엔 왕년에 알아주던-그라운드의 어린왕자라는 닉네임까지 달았지만 부상으로 남들보다 빠른 은퇴를 한 뒤, 후배양성을 목표로 뛰어든- 오상식 감독이 부임하면서부터 모든 학교로부터 견제 받는 존재가 돼버리고 말았다. 아마 이번 달에 있을 대통령배 또한 이변이 없지 않은 이상 결승까지는 쉽게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결승전을 누구와 할 것이냐인데 예상은 뻔하디 뻔했다. ‘삼정고’ 지난 10년간 단 한 번도 대통령배 결승을 놓쳐보지 않은 강팀이다. 우리 학교에서 감독을 맡고 있는 오상식 감독의 모교이자 하성준 같은 든든한 투수를 배출해내는가 하면 성준식처럼 발빠른 1번 타자나 프로야구 신인왕과 MVP를 동시에 거머쥔 4번타자 김동식, 경기를 좌지우지하는 두 뇌를 가진 포수 강해준을 배출해내기도 했다. 오상식 감독이 목에 핏발을 세울 수 밖에 없는 이유였다. 


“우승하면 올 해 지명받을 수도 있는거야?” 
“글쎄, 내가 잘해야하지 않을까” 
“뭐야. 잘하겠지” 
“푸흐흐. 결승전 와라” 
“담임이 빼줄 리가” 


입이 대빨 나온 장백기가 내 어깨를 제 어깨로 툭툭 쳐대며 불만을 토로한다. 야, 장 그래. 이거 진짜 중요한 경기라고. 내 일생이 걸린 경기라니깐! 결승전이나 가고 말해. 에이- 가겠지. 너 그렇게 자만하는거 오감독님도 아시니? 야. 이게 또 꼰지르려고. 알면 잘하라구. 그렇게 한 참을 투닥거렸을까. 어느 새 우리가 걷던 길의 끝이 보인다. 



“그래야, 올 해에 내가 지명을 받으면” 
“......” 
“우리 사귈래?” 



네가 사라지는 걸 바라보던 그 길목. 너와 내가 마주보고 섰다. 나보다 머리하나는 더 있을 키의 백기는 나를 내려다보고 숨을 내쉰다. 그 날숨이 내 목과 쇄골을 간질인다. 두 손을 주먹 쥔 채 꼼지락 거리는 것이 말해주고 있었다. 장백기, 긴장했다. 


그래야. 우리 학교는 말이야. 야구부가 유명한 학교도 아니였고, 그래서 지원도 많이 못받았단 말이야. 맨날 다 헤진 글러브 돌려가며 쓰고 야구배트도 허구한날 부러지는거 잘 쳐도 부러뜨렸다고 욕먹고. 근데, 제일 서러운건 네모난 운동장에서 뛰어야한다는거야. 야구는 다이아몬드 모양 운동장에서 해야하는데 말이야. 스케이트 선수한테 물에서 뛰라고 하는거나 마찬가지라니깐? 그래서 그런지 우리들 꿈은 다이아몬드 구장에서 뛰는 게 꿈이 됐어. 빨리 이 학교 운동장 구석을 벗어나고 싶은거지. 프로선수가 되면, 아니면 대학야구를 하게 되면 그래도 다이아몬드 모양 안에서 뛸 수 있잖아. 나는 마운드에만 올라가면 설레면서도 마음을 다잡는데 그 때 필요한 게 딱 두 가지야. 다이아몬드, 그리고 너. 이 둘만 생각하면 운동장을 붕붕 떠다니는 심장도 제 자리를 찾아서 돌아오고, 글러브를 축축하게 만드는 손도 보송해져. 체인지업을 던지면 타자들이 멍하고 배트를 들춰 매고 서있는데, 그렇게 삼진을 몇 개를 잡았는지도 모르겠어. 프로선수가 돼서 다이아몬드 안에 마운드를 밟고 싶어. 그게 현재 내가 가진 가장 큰 꿈이야. 그리고, 널 내 옆에 두고싶어. 지금처럼, 친구 말고. 



백기에겐 틱틱대며 일렀지만. 올 해 고교리그가 끝나고 나면 누구보다 주목받고 있는 선수 장백기는 프로야구 진출에 한걸음 다가갈 수 있다. 오감독님도 그 것을 알기에 매 중요한 경기, 스포츠기자들이 기자석을 채운 경기에는 백기를 선발로 내보낸다. 프로야구와는 달리 선발투수가 한 경기 내내 등판하는 고교리그에서 백기는 9이닝을 지배한다. 그리고 또 한 번 중요한 경기를 앞둔 지금. 장백기는 나에게 고백을 하고 있다.


조심스레 내 어깨에 손을 올린 장백기는 고개를 내려 한 참 밑에 있는 내 얼굴로 시선을 마춘다. 그와 내 얼굴이 가까워졌을 때, 나도 그의 움직임에 화답하듯 고개를 들었다. 어둑한 골목, 마주선 우리는 난생 처음 보는 서로의 얼굴을 달빛에 비춰가며 낱낱이 관찰했다. 운동하는 남자답지 않게 하얀 피부, 쌍커풀 없는 눈매가 한 편으론 싸늘해 보이지만 날 향해 웃으면 그 무엇보다 따듯하다. 눈을 마주보고 서로의 눈동자에 비춘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듯 가까이에 서서 눈으로 마음을 확인한다. 장백기는 결심했다. 조심스레 가까워진 얼굴, 그의 입술이 조심스레 내 입술을 찾아든다. 따듯한 온기가 내 입술을 감싸고 촉촉이 적신다. 긴장한 몸은 조용히 입술만 부딛힌 채 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지만, 우리 둘에게는 그 것만으로도 온 몸이 달아올랐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입맞춤이였다. 




“다이아몬드가 내 꿈인 것처럼. 장그래, 너도 내 꿈이야.” 


이번 경기를 우승하고 다이아몬드에 한걸음 가까워진다면 장그래 너도 나한테 그만큼 가까워졌으면 좋겠어. 그리고 내가 다이아몬드를 밟게 되는 것이 결정되는 그 날, 너도 나한테 와줘. 






장백기는 날 품에 쏙- 안더니 이내 수줍게 발걸음을 돌렸다. 매일 아침 부원들과 줄지어 운동장을 돌 때보다는 조금 느린 걸음. 하지만,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나에겐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백기의 뒷모습이 사라진다. 난 평소처럼 그 뒷모습을 눈으로 쫒았다. 점점 점이 되어 사라지는 뒷모습이 부끄러움에 발게진 것 같아 픽, 하고 입꼬리를 올릴 무렵 

장백기가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쓰고있던 모자를 벗어 크게 흔들어댄다. 안녕-! 바보, 그냥 손만 흔들어도 다 보이는데 말이다. 그 인사에 똑같이 팔을 흔들며 답을 해주었다. 보이진 않지만 장백기의 웃음이 공기 중에 흩어져 내 들숨에도 섞여 들어온다. 


그의 고백에 난 뭐라고 했던가. 난 아마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장백기, 넌 모르겠지만 말이야. 네가 운동장에서 다이아몬드를 꿈꾸고 있을 그 시간. 난 창밖을 보면서 너를 꿈꿨어. 네가 다이아몬드를 밟게 되는 날, 내 꿈도 이뤄졌으면 좋겠어. 



+)


스마트폰의 인터넷 창을 몇 번이나 아래로 당겼다가 놨을까. 그렇게 새로고침을 한 인터넷 창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기사가 업데이트 된다. 아씨, 왜이렇게 느린거야. LTE니 뭐니 다 통신사의 농간임이 틀림없다. 한 번에 뜨지 못하고 버벅거리는 사진 창이 답답해 또 한번 인터넷 창을 아래로 끌어당기자 옆에서 같은 창을 뒤져보고 있던 한석율이 내 등짝을 짝 소리나게 때렸다. 장그래, 그렇게 해서 핸드폰 잘도 망가지겠다. 그래, 내가 좀 오버하긴했지. 근데 답답하잖아!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책상에 고개를 박아버렸다. 으으- 석율아 나 못보겠어. 한석율은 제가 뭐라고 덩달아 긴장해 책상에 앉은 발을 동동굴린다. 얇은 나뭇바닥의 진동이 내 발 밑까지 느껴진다. 내가 내려놓은 핸드폰을 가져간 한 석율은 또 다시 새로고침을 눌러보는 것 같았다. 병신, 나보곤 오바하지 말라더니. 그래 너한테 맡길래. 너 알아서 해라- 싶은 마음으로 한석율에게 핸드폰을 맡긴 채 두 귀를 양 손가락으로 막아버렸다. 교실의 모든 소리가 차단되자 심장이 벙벙 거리는 소리가 느껴진다. 붕, 붕, 붕, 한 다섯 번 정도 반복됬을까? 엎어진 내 등위로 느껴지는 마찰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야! 한석율 왜 때려!!! 아프잖아!


내 신경질은 아랑곳 않고 한석율은 오도방정을 떨며 내 팔뚝을 다시한 번 철썩철썩 때리더니 스마트폰 화면을 두 눈에 들이 밀었다. 가까워진 액정의 환한 빛에 눈을 찌푸리고 그 안을 쳐다봤다. 


[프로야구 One .INT 1차지명 장백기]


그 아래 낯선 파랑색 유니폼을 입은 채 주먹을 쥐고 웃고 있는 네 얼굴이 있다. 


이야, 장백기 또 사고쳤네. 대박! 원인터 정도면 선발은 우스운거 아냐? 프로야구 지명회의는 전 시즌 최하위 순위부터 지명의 기회가 주어진다. 주요선수들이 FA로 모두 빠져나가게 되면서 경기의 흐름을 잃은 원인터는 급격한 속도로 추락하더니 지난 해 시즌 최하위의 성적을 거뒀다. 그리고, 그 원인터에게 가장 처음 지명의 기회가 주어진 순간, 장백기의 이름이 불렸다. 팀 내의 1차 지명이기도 하거니와, 지명회의에서 가장 처음으로 불려진 이름. 그 가치가 장백기의 가치를 말해주고 있었다. 1,2선발이 동시에 팀을 떠나버리고, 타자들도 부상에 페이스를 잃어버린 시기. 시즌 내내 고생길이 훤하긴 했지만, 백기에겐 오히려 좋은 기회였다. 선배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선발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기 때문이다. 그래는 액정속 환하게 웃는 백기의 미소를 따라 미소를 짓곤 토독토독 문자를 보냈다. 


‘축하해, 장백기. 내 애인’


장백기 그리고 장그래의 꿈이 이뤄지는 날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