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율그래] 호명연가
호명연가
-제 이름이 불리기를 바라는 사랑의 노래-
그래야. 연무군 오셨다! 풍월관 대문에서부터 조신치 못하게 한 쪽 치마를 접어들고 저에게 달려오는 매화는 그래의 어깨를 붙잡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 뒤를 졸졸 쫒아오는 명월이는 곱게 땋아올린 머리가 무겁지도 않은지 연신 그래의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조잘댄다. 오라버니! 뭐하고 있는거야! 빨리 치장하지 못하고오! 그래의 등을 떠미는 두 여인내의 악력에 그래는 결국 두 손 두 발 다들었다. 결국 정원에 물을 주던 손길을 멈추고 대문에서 멀리 떨어진 부엌 뒷 편 제 방으로 숨어들었다.
엣헴- 게 누구 있느냐. 통이 큰 소매를 하느적 거리며 풍월관의 높은 문턱을 넘어온 자. 단정하게 묶은 말총머리와 갓 아래로 동양의 언 남자와는 조금 다른 진한 상커풀의 눈매가 보인다. 그 아래로 사내답지 않게 갸름한 턱선과 미간 사이부터 높이를 자랑하는 콧대가 한 대 어울린다. 연무군. 석종 24년, 황제국의 연방국이 되라는 종용에 갈피를 잡지 못하던 왕을 대신해 군대를 이끌고 전장을 향한 사나이. 그 곳에서 수백 명의 적군을 아비규환으로 만든 뒤 처참히 죽이고 조국의 자존심과 무관으로서의 명예를 안고 금의환향해 조국 곳곳에 제 이름을 알린 참무관. 그의 본명을 잘 알지 못하는 백성들은 그를 연무군이라 칭했다.
하지만 그가 불리고픈 이름은 따로 있었으니 그의 본명 한 석 율 이었다. 실제로 석율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열 손가락에 꼽았다. 오랜 친구였던 세자 장백기, 이웃집 안 가문의 여식 영이, 그리고 제 가족들. 석율은 그 외의 이들에게 제 본명을 스스로 알리는 일이 없었다. 자연스레 그의 이름을 알게 된 이들도 그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그의 이름을 쉽게 입에 올리지 않았다. 누군가 그 것에 대해 이유를 묻자 연무군은 이리 답했다고 한다. 제 아비가 지어주신 소중한 이름. 정말 제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들에게만 불리우고 싶습니다. 그리고 오늘, 국경 근처 오랑캐들이 일으킨 작은 소란을 직접 처리한 뒤 흙먼지를 날리며 풍월관에 도착한 석율은 기방에 드러앉아 입을 열었다.
“그래야, 내 이름 한번만 불러보아라. 응? 자 한..석율...”
“왜 이러십니까 나으리”
그래는 덥썩 잡아오는 석율의 손길을 화들짝 놀래 제 손을 빼내며 말한다. 왜 이러십니까. 사내 대장부 한 석율. 전장에서 몇 백명의 머리를 댕강 잘라버리는 패기의 한석율. 이대로 포기할 순 없지. 석율은 제 옆에 곱게 앉은 그래를 향해 좀 더 상체를 밀착시켰다. 수줍음이 많은 것인지 두 볼이 발그레한 그래는 제 오른 편에 가까이 다가온 석율의 얼굴이 부끄러운지 연신 고개를 내리깔고 있다. 좀 더 다가가도 모르겠지. 석율은 그래가 시선을 내리 깐 지금이 기회다 싶었다. 쪽- 석율의 촉촉한 입술이 분홍빛 볼을 훔친다.
“뭐하시는 겁니까?”
다시 한 번 화들짝 놀란 그래는 이내 고개를 들어 제 볼에 마주한 석율의 눈을 맞추더니, 생각보다 너무 가까운 그 얼굴에 다시한 번 당황한 듯 했다. 그래는 있는 힘껏 한쪽 팔로 제 어깨에 맞닿아있는 석율의 어깨를 밀어버렸다.
“윽!”
“에그머니나!”
석율이 아무리 대장군이라지만, 무방비한 상태에서 들어오는 그래-관리인을 제외한 풍월관의 유일한 사내로서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야했던-의 공격을 맞받아치기엔 어려웠을 것이다. 순식간에 제 가슴에 느껴지는 엄청한 통증에 석율은 홀라당 뒤로 자빠져버렸다. 나으리! 괜찮으십니까? 전장을 누비던 사내라더니 어째 제가 한번 밀쳤다고 홀라당 넘어가버리시나요. 그래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쉽게 쓰러져버린 석율을 탓하며 바닥에 등을 대고 눕다시피- 넘어가버린 석율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그 모습을 멀찍이 지켜보자면 석율의 위로 그래가 올라 탄 형상과도 같았다.
으으, 그래야. 아프구나. 제 위에서 그래가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연무군은 한 껏 두 눈을 찌푸리며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보다 못한 그래가 답답한 마음에 제 신분에 무례하다는 것도 잊어버린 것인지 제가 밀친 석율의 가슴팍을 지분거렸다.
“여기가 아프신겝니까? 아님 여기?”
장 그래 네 이놈. 다 알면서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순진한 눈으로 제 가슴팍을 지분거리는 꼴이 오늘 아주 잘 걸렸구나. 내 지금 날 지분거리는 것 곱절로 오늘 밤 갚아주마. 석율은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미간을 좁히느라 억지로 반쯤 감겨있던 눈이 떠지고 저를 위에서 지켜보고 있는 그래의 얼굴이 들어왔다. 석율은 조심스레 상체를 일으켰다. 그 움직임이 너무나도 미약해 그래는 시야에 석율의 얼굴이 가득 차기만 했을 뿐, 별다른 움직임을 관찰할 순 없었다. 곰곰이 그래의 얼굴을 살피던 석율은
“으익!”
그래의 양 어깨를 부여잡고 다시 한 번 뒤로 발라당, 넘어져버렸다. 석율의 몸 위로 엎어져버려 당황한 그래가 얼른 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그 몸을 제 하체로 가둬버린 장군의 힘에는 역부족이었다.
“연무군! 놓지 못하시옵니까?!”
제 품안에서 발버둥을 치는 그래가 마냥 귀여운 석율은 그래의 붉은 두 볼을 앙칼지게 꼬집었다. 고통스러움에 그래의 미간이 점차 좁혀졌지만 석율은 전혀 게의치 않았다.
“연무군 말고 한 석 율”
“....연ㅁ”
“우리 그래가 석율이라고 불러주면 싸악 나을 것 같은데”
양 쪽 눈을 있는 힘 껏 접어보이며 미소짓는 석율의 얼굴에 그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래의 어미는 이 풍월관에서 그래를 낳았다. 기생이였던 그의 어머니는 그 어떤 양반 가문에서도 머리를 올려주지 않아, 아비도 알 수 없는 그래를 낳은 뒤 이 풍월관에서 잠들었다. 그래는 자연스럽게 기생들의 손에서 자랐다. 풍월관의 안주인은 사내놈이 너무 여자 손만 타서도 안된다며 기녀들을 말렸지만 그녀들은 이미 콩알만한 얼굴 안 이목구비를 보며 눈치를 챘다. 우리 그냥 그래 남기로 키우면 안되요? 안주인은 귀가 솔깃했다. 제 입장에서는 엽전을 가져오는 수단 밖에 안 되는 기생이 데려온 짐 같은 존재가 장차 더 큰 부를 가져올 것이였다. 그 생김새를 보아하니 못해도 나라의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장군 한 명 쯤은 눈 뜨고 코 베어갈 만한 외모였다. 허나, 풍월관은 남기로 장사하는 기생집은 아니었다. 여러 명의 남기를 데리고 하는 장사면 모를까. 단 한명의 남기는 어쩌면 화를 부를지 도 몰랐다. 예컨대, 남기를 탐하는 것에 혐오감을 느끼는 양반댁 자제가 기방을 난장판으로 만들어놓는다거나.. 혹은 단 한명의 남기를 차지하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그에 낙심한 기녀들이 기방을 떠난다던가...하는? 풍월관의 안주인은 기녀들에게 일렀다. 그 아이가 우리 집에서 남기가 되는 일은 절대 없을거야.-이 말은 어쩌면, 다른 집으로 팔아버리겠다는 소리기도 했다- 허나 모르는 일이니 적당히 교육 시키도록 하자꾸나.
그 날 이후로 그래는 사내답게 키가 커지면 안된다는 이유로 밤 마다 밧줄로 몸을 옭아맸다. 아침에 일어나면 아직 기적에 오르지 못한 소녀들과 함께 춤과 노래를 배웠고 가야금도 익혔다. 그래는 남자란 이유로 거문고까지 함께 배워야했다. 그래는 사내로서 익혀야 할 것들과 기녀로서 배워야 할 것들을 동시에 배우는 것에 이골이 났다. 이 때 쯤, 저와 비슷한 또래의 기녀들이 풍월관에 들어왔다. 매화나 명월이 같은... 그들은 함께 춤과 노래를 배우고 시조를 읊으며 우정을 나눴다.
그래는 늦은 나이에 바둑을 배웠다. 관리인은 그래의 솜씨를 보며 땅을 치고 후회했다. 이런 소질이 있는 지 알았으면 진작에 가르쳤어야 했었구만! 열 하나, 바둑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엔 조금 늦은 나이였으나 기방에 방문한 자제들을 상대하기엔 꽤나 좋은 실력이였다. 제 실력을 발견한 뒤로, 그래는 다른 교육들에 소홀해졌다. 바둑이 재밌었다. 한 돌, 한 돌 올리며 승부가 결정나는 놀이. 승자와 패자가 엄격히 나뉘는. 한 돌을 올리기 전 모든 기를 모아 집중하는 그 놀이가 매력있었다.
그래의 바둑 솜씨는 안주인에게 까지 전해졌다. 기적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면 밥데기나 시킬려했건만. 어쩌면 기적에 이름을 올리고 남기로 다른 기생집에 팔아버리는 것 보다 더 좋은 장사수환이 될 수 있겠어. 안주인의 판단은 정확했다. 바둑에 매진한 그래는 어느 양반집 자제보다 탁월한 실력을 보였고, 분위기에 따라 상대의 성정에 따라 바둑을 이길수도, 져 줄 수도 있는 경지였다. 술상이 오르기 전, 그래는 기방에 들어가 양반들을 상대하며 바둑을 뒀고 이따금 내기바둑을 걸어 양반들의 주머니를 홀라당 털어버리기도 했다.
그래와 석율이 첫 만남을 조우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였다. 전장터를 나가기 전 홍삼 빨 듯 기운충전 함 합세- 하는 천박한 어르신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들린 풍월관. 그 곳에서 석율은 바둑돌로 저를 시험에 들게 하는 그래의 반짝이는 눈빛을 발견했다. 하이얀 얼굴에 어딘가에 여러번 비빈 냥 도톰한, 허나 매끄러운 입술, 비대칭을 이루는 듯 살짝 다른 양쪽 눈매가 그 어느 쪽도 어설프지 않게 코, 입과 어울렸다. 그래, 이 소년은 저가 봐온 어떤 기녀보다도 아름다웠다. 그래가 바둑 돌을 들고 사라지고 술상이 들어왔다. 기녀들은 보통의 아낙네들이 입는 저고리의 반도 안되는 길이의, 머릿카락처럼 하늘 거려 속이 훤히 보이는 저고리와 치마 매듭을 어이 맨 것인지 궁딩이를 땠다 붙일 때마다 펄럭이며 그 속살이 보이는 치마를 입고 들어온 기생 몇 명이 장군들 옆에 한 명씩 붙어 술을 따라주기 시작했다.
노인네들은 뭐가 좋은지 기녀들의 풍만한 가슴을 주물떡 거리며 연신 술을 들이켰다. 노망난 것들, 몇일 뒤 거사가 치러지는데 뭐가 저리 좋은지. 한 편, 저에게 손끝하나 시선하나 주지 않는 연무군 덕에 맘이 상한 한 기녀는 연무군의 어깨에 기대 콧소리를 내었다. 나으리- 소녀 술 한잔 따라드리오겠습니다앙 그 콧소리에 분위기를 맞추려 참고 참았던 석율의 인내심은 폭발을 했고, 석율은 제 어깨에 기댄 얼굴을 아랑곳않고 벌컥 문을 열고 발걸음을 옮겼다. 기방 안에서는 석율의 어깨에 기대있던 기녀가 앓는 소리를 냈지만 다른 장군들은 이미 술과 여자에 취해 석율의 존재조차 잊은지 오래였다.
텁텁한 공기를 벗어나 정원을 누비던 석율은 문득 호기롭게 바둑을 두던 두 눈동자가 생각났다. 마침 하늘을 보니 그 눈동자와 비슷한 빛깔을 내는 것들이 촘촘히 박혀 석율의 얼굴을 비추고 있다. 얼마나 걸었을까. 넓은 풍월관 한쪽 구석에 있는 누각을 발견한 석율은 잠시 쉬고자 제 신을 벗었다. 그 때 낯익은 목소리가 울렸다. 누..누구신지요? 방금 전 까지 돌 하나로 저를 쥐락피락 하던 그 사내였다. 나는 연무군이라 하오만, 그 쪽은 뉘신지? 한 귀로 들어도 근엄한 목소리와 그 목소리가 밝히는 신분에 그래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어찌 그리 높으신 분이 기방에 계시질 않고 이곳에. 그래의 목소리를 들은 연무군은 순식간에 장난기가 올라왔다. 오호라- 네 녀석은 아까 그 녀석이구나. 주제 모르고 돌 하나 쥐고 날뛰던. 석율의 예상대로 그래는 당황해 몸을 벌벌 떨었다. 저보다 한 참이나 높으신 분이 호통을 치는 데 그 것을 장난으로 여길 강심장이 어디있으랴.
아, 그것이 아니옵고. 분위기를 살린다는게 그만. 어둠에 가려 석율이 저를 볼 수 없었지만 그래는 송구한 마음에 연신 허리를 구부렸다. 죄송합니다. 나리- 제가 감히. 한 번만 용서해주시지요. 제 앞으로는 절대 나리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겠습니다. 석율은 생각했다. 허허, 녀석 바짝 쫄았구나. 어째서인지 이 장난을 멈추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저는 곧 다른 장군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다시 기방에 들어가야 했고, 앞의 사내는 한 번만 더 불호령을 내리면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았다. 석율은 제 앞에서 연신 허리를 숙이고 있는 소년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저를 해할 것이라 생각한 것인지 소년의 작은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 모습이 귀여워 석율은 하핫- 하며 웃어버렸다.
‘왜 웃으시는 겝니까?’
‘아니다. 그나저나 반성은 다 끝난 것이냐?’
‘아, 나리. 그것이 아니옵고’
‘내 너에게 너의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주겠다.’
‘그 것이 무엇이옵니까?’
연무군은 목을 큼큼 가다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나를 한 석율이라 불러보아라’
그 날부터일까, 이 질긴 인연이! 그 날이후로 석율은 전장에 나갈 때를 제외하곤 거진 풍월관에 살다시피 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다른 한량들처럼 기생들을 주물럭거리거나 거나하게 술에 취하려는 것이 아니였다. 단지 기방의 유일한 남자, 그래를 보기 위한 것이었다. 매일 밤을 풍월관에서 지새우다 못해 나중에는 짐보따리 까지 싸들고 집을 떠나는 석율에게 그의 아비는 생전 처음 양반답지 못한 큰 소리를 냈다. 하지만, 곧 이어 전하께서 친히 석율을 불러 지난 전술을 칭찬하시니 아비로서 기가 죽어 차마 더는 석율을 혼낼 수 없었다. 석율은 그렇게 제 본업에 대한 능력을 방패삼아 그래에게 작업을 걸었다.
그래가 밀어낸 가슴팍을 핑계 삼아 그를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 그 다음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석율은 그래의 옷고름을 풀어해쳤고 그래는 얌전히 촛불을 입으로 후 불었다. 쉽게 풀어지는 옷 고름 사이로 보드라운 살결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래는 본래의 강직한 성격만큼이나 잠자리에서도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우지 않았다. 석율이 만지는대로, 핥아주는 대로 훅훅 밀려오는 자극들에 세심하게 반응했다. 석율은 그래가 얌전히 제 품에 안기니 행복했다. 뭐, 그렇지 않더라도 제겐 방법이 많았다. 신분차를 빌미로 옷을 벗으라 명령할 수 도 있었고 직업상 항상 한쪽 어깨에 차고 다니는 칼을 들이밀어도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석율은 저의 소중한 그래를 그런 식으로 하대하고 싶지 않았고 얌전히 제게 기대오는 동그란 머릿통이 고마울 뿐이었다.
“우리 그래는 왜이리 어여쁜 것인고?”
“제 어미를 닮아 그렇사옵니다.”
“어허, 이럴 땐 나으리의 사랑을 받아 그렇사옵니다- 해야하는게다”
“나으리의 사랑을 받지 않아도 예쁜데 어찌 그리 말해야하는 것인지요?”
석율은 이처럼 당돌한,-또 그만큼 사실만 말하는- 그래의 성정에 가슴이 간질거려 한쪽 어깨에 뉘여있는 그래의 머리를 가슴팍으로 쑥- 끌어당겨 안았다. 흐흐, 갑갑하지? 내 널 사모하는 만큼 세게 안는 것이니 죽더라도 내 품에서 죽거라. 그래는 맨 살이 닿는 석율의 품이 좋은지 저항하지 않았다.
“그래야, 정말 따악- 한 번만 불러보거라. 한 석 율”
“싫습니다. 뉘가 듣고 관청에 고발이라도 한다면 어찌합니까. 소인 아직 곤장이 무섭사옵니다.”
“언 놈이 고발을 한다는게야? 내 그 놈을 그냥 확!”
“나으리 진정하시지요”
으허허허 농담일세 농담. 그래가 쌜쭉한 눈으로 석율을 쳐다보았다.
“연무군”
“응?”
“제가 연무군의 존함을 부르면 저에게 무엇을 해주시렵니까?”
석율은 여전히 제 어깨에 기대 누워있는 그래의 이마를 제 두꺼운 손으로 쓰다듬었다. 온기에서 온기가 전해져나간다. 우리 그래가 무엇을 원하는게냐. 말해보거라. 연무군 께서는 총기-총애하는 기생- 가 있으시옵니까? 있다마다. 당연 우리 그래 아니겠느냐. 그래는 또 한번 쌜쭉한 눈을 했다. 그 말씀은 즉, 저는 여럿 기생들 중 한 때 잠시 총애하는 것일 뿐이라는 겝니까? 석율은 당황해 상체를 일으켰다. 석율의 움직임에 그래 또한 상체를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네 어찌 그리 무심한 소리를. 그래, 내 너의 머리를 올려주마. 비록 네가 기적에는 올라가있지 않다하지만 이 기방의 소속인 몸. 내 너의 머리를 올려주겠노라. 그래는 쌜쭉한 눈빛으로 쏘아대는 저의 놀림에 한참이나 윗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쩔쩔 매는 석율이 사랑스러웠다. 어쩌면 처음 만난 그 날, 저를 놀리던 그 심정이 이와 같았을까. 그래는 복수를 하기로 결심했다.
허나. 허나 또 무엇이 문젠고? 머리를 올려주겠다는 기약은, 절 애첩 삼으시겠다는 것 아니옵니까. 그래 맞지. 내 너를 애첩 삼아 나의 집에 가둬 물고, 핥고... 나리! 부끄럽지도 않으신겝니까. 내 너의 머리를 올려주고 애첩 삼으면 안되는 것이냐? 그게 아니옵고, 애첩이라 하믄... 첩 아니옵니까? 그래를 마주본 석율은 제 얼굴의 모든 구멍을 죄 키우는 듯 싶었다. 그래가 하는 말을 저가 착각하는 것인지. 아니, 도대체 그래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것인지 머릿 속에 생각은 박히는데 결론으로 빠져나오진 않는다. 소인은, 첩살이는 하고 싶지 않사옵니다. 석율의 두 뇌는 빨간 불이 켜졌다. 그 불은 언제 석율의 얼굴에 옮아온 것인지도 모르게, 순식간에 석율의 얼굴이 불타올랐다. 석율을 마주 본 그래는 그런 그의 얼굴을 못 본 척 얌전히 고개를 내리깔았다. 풋, 불타는 고구마 같구나. 아이 꼬셔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석율은 이내 벽에 기대어 옆 방에서도 들릴만큼 큰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흡, 후- 흡! 후- 이내 벌벌 떠는 손으로 고개 숙인 그래의 얼굴을 들게 한 뒤 제 눈과 시선을 맞춘 석율은 그래에게 물었다. 네 정녕 그 것을 원하는 것이냐. 너만 원한다면 뭔들 못하리! 진작에 그랬어야했는데, 널 내 방으로 데려왔어야 하는데!!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석율은 여전히 벌건 얼굴을 하고선 두 다리를 퍼덕 거린다. 그 모양새가 이름을 떨치고 있는 대장군스럽지 않아 그래는 웃음이 났다. 허나, 나으리. 그래, 그래야. 내 안다. 본래 기녀는 정실부인이 될 수 없음을 안다. 그리고 사내는 더더욱. 허나 그게 뭔 문제가 된 단 말이냐. 내 그 어떠한 정실부인도 다른 첩도 받아드리지 않을터인데.
석율을 조금 골려주고자 시작한 장난. 그래는 할 말이 없어졌다. 절절히 제 맘을 고백해대는 석율의 발간 얼굴을 바라만 보았다. 윗사람 답게 위엄좀 지키시지요. 위엄! 네 앞에서 그게 뭣이더냐. 그저 내 맘만 알아다오, 그래야. 그래는 석율의 숨막히는 애정공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확인한 석율이 다시 조심스레 그래를 제 팔 안에 가두었다. 창호지 안으로 달빛이 스며들어 석율과 그래를 감싼다.
“ 자, 이제 내 약조했으니 정말로 한 번 불러보거라”
“........석..율..”
“크게 불러도 좋다, 그래야.”
“....한석율”
“그래. 그래야”
“한석율... 공자님 사모하옵니다”
+)
호들갑을 떨어오는 매화와 명월이에게 이끌려 부엌 뒤 한 구석에 마련된 제 방으로 몸을 숨긴 그래는 지난 밤, 연무군이 저에게 선물하고 간 작은 청동거울을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가 적당히 이마를 드러내고 있다. 이 정도면 괜찮았다. 연무군은 유독 그래의 이마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다시 시선을 내려 두 눈을 살폈다. 음, 눈꼽도 없고 좋아. 코도 마찬가지다. 그래는 한 참 제 입술에 시선을 옮겼다. 흠.... 너무 붉으스름 한데, 혹여나 오해하시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저에게 사내는 연무군 뿐인데.
오라버니, 뭐하는거야! 연무군 기다리시잖아
명월이의 재촉에 그래는 거울을 내려놓고 문 앞에서 종종거리고 있는 명월이에게 물었다.
얘 명월아. 나 괜찮지?
바둑할 때나 보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지는 그래의 얼굴에 명월은 푸하하! 하며 웃어보였다. 그리곤 너무 대놓고 비웃었나 싶어 미안한 마음에 찬찬히 그래의 얼굴을 살폈다. 뽀얀 피부 좋고, 머릿결 윤나고 좋고.. 음 입술이 참 붉다. 다른 기집들은 붉은 입술을 내기 위해 이것 저것 발라도 안되던데. 명월은 새삼 그래의 입술이 부러웠다.
다 좋아 오라버니. 아 잠깐만
명월은 문 앞에 심어놓은 붉은 봉선화 입을 떼더니 제 손으로 짓이겼다.
얘 뭐하는거야
명월이는 붉게 물든 손가락을 들어 그래의 볼에 톡톡 두들겨주었다.
오라버니. 사내들은 그렇다네. 추워서 홍조가 생겨도, 더워서 열기가 올라도 제 옆에 볼빨간 연인만 있으면 저 때문에 그런줄 안대.
그래는 미소를 지었다.
예쁘게 칠해줘, 명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