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율그래] 그래도 나 사랑하지
똑-딱, 똑-딱. 하나 둘 씩 꺼지는 조명을 창문 밖에서 바라봄과 동시에 혀로 꼴깍대며 초를 샜다. 칠층, 육층… 장그래가 속해있는 이상네트웍스의 층수 4층의 불빛은 전혀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원인터네셔널 퇴사 후 오차장님의 이상네트웍스에 입사한 장그래는 회사의 직원이 저 혼자밖에 없는 듯, 이리저리 몸을 혹사시키기 바쁘다. 주 5일 근무에 주 6일 출근은 필수요, 한 달 중 2주의 출장은 (오차장님의) 선택일 지니! 힘없고 빽 없고 어여쁜 장그래는 이상의 신데렐라를 자처하고 나섰다. 그 덕분인지 매일 홍삼스틱을 한 입씩 먹여감에도 불구하고 데이트를 할 때면 장그래는 뱃가죽이 등가죽에 붙은 것 마냥 피골이 상접해있다. 물론, 여느 할머니에게 본인의 손자는 삐쩍 꼬른 모냥이듯 내 눈에도 포동포동한 장그래가 더 이뻐보인다는 확률도 배제할 순 없다.
하여튼, 누가 일과 사랑 사랑과 일 중 뭘 선택할 것이냐 묻는다면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일이요’ 라고 답할 장그래는 이 한석율이 주차를 해놓고 혀로 똑딱똑딱 초 단위로 시간을 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쉽사리 고 이쁜 얼굴을 보여줄 생각을 않는다.
[우리 그래 언제 나와?]
[기다리십쇼]
이 봐, 이 봐. 정말 일에 열중해 있다면 이렇게 칼답을 할 순 없다. 칼답은 칼답대로 할 거면서 그냥 좀 일찍 나와주면 어디가 덧나나. 눈으론 모니터를 보고있으면서도 조그만 머리통은 온통 스마트폰을 향해있을 장그래를 생각하니 심장 근처가 아지랑이 피듯 간질간질하다.
[보고싶다. 장그래… ]
우리 못 본지 벌써 10시간이 넘었어. 뽀얀 볼을 두 손으로 감싸안고 너른 이마에 쪽, 사내 다운 눈썹 뼈에 쪽, 동글동글한 콧봉오리에 쪽, 마지막으로 꿀 바른 듯 달짝지근한 두 입술에 쪽 하고싶은데 이런 내 맘을 알긴 하는건지, 알면서도 모른 척 하는건지. 잔인한 장그래는 방금 전 문자와는 달리 답도 없다. 아무래도 방금 전 칼답은 보고서 작성 중 잠시 숨돌렸을 때 알람이 띵동 울린 우연 때문이였나 보다. 냉정한 장그래.
보고싶단 말에 정확히 14분 29초 후 답장이 울렸다.
[그러게 먼저 가라니깐요]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성대리의 잔업투척을 비사이로막가처럼 피해 칼퇴하고, 장그래를 기다린 결과가 이거라니.
정말 섭섭하다.
원인터네셔널의 공식 퇴근시간 6:00PM. 원인터에서 이상까지 거리, 승용차로 약 25분. 장그래가 일하는 책상이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 저쯤에서 일하겠구나- 혼자 상상할 수 있는 위치에 주차하는 시간 약 5분. 그리고 퇴근할 장그래를 기다린 시간 45분. 도합 1시간 15분, 그러니까 현재 시각은 정확히 7시 45분이다.
아침에 장그래를 이상까지 데려다주면서 오늘은 꼭 같이 퇴근할 꺼라 못을 박았었다. 장그래의 집. 그 집을 가려면 난 어차피 네 회사를 지나가야 하고, 퇴근하는 길 승용차로 30분이면 갈 거리를 넌 힘들게 1시간이나 낭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퇴근 후 약속장소에서 널 기다리느니, 차 안에서 기다렸다가 함께 영화도 보고 밥도 먹는게 우리 그래를 1분 1초라도 더 볼 수 있으니까. 이런 나의 설득에 마음이 살짝 동한 그래는 머뭇거리더니 귀끝이 발게지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수줍게 허락을 할 거 였으면 도대체 난 이 좁은 차안에서 1시간 15분 동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물론 그래의 눈 생각 5분, 입술생각 5분, 잘록한 허리 10분,, 봉긋한 엉덩이…1..5분…. 시간은 금방간다. (얼굴이 후끈해지는 것은 덤이다.) 하지만 장그래는 너무 무신경하다. 아침에 입에 모터라도 단 듯, 널 대려가겠다고 설득했는데.. 그래서 성대리의 구박에도 얼굴에 철면피를 깔고 정확히 6시 30분까지 이상네트웍스에 도착했을 나를 알면서도 제 일이 바쁘단 이유로 나를 모른 척한다. 사실 오늘은 조금 기대했었거든.. 주말에 쇼파에 내 무릎을 베고누워 뭘 방영하나가 아닌 리모콘 버튼을 누르는 행위에 집중한 듯 자동적으로 채널을 바꾸다가 멈칫하며 ‘어, 저 영화 재밌겠네요. 좋아하는 배운데’ 라고 흘린 네 목소리에 몇 일 전부터 안경쓰고 보는 영화 명당자리를 예매해놨구, 매일 가는 카페는 지겨울까봐 너의 집 근처 새로 생긴 디저트카페도 찾아놨었는데. 이미 현재 시각은 영화 상영시간을 20분이나 초과했다.
평소에 장그래에게 섭섭한 일이 있다가도 더 많이, 먼저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란 생각 하나로 모든 감정을 묻었다. 남자와의 사내연애를 질색팔색하던 장그래를 입사 후부터 1년간 졸졸 쫒아다닌 저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교제를 OK했던 날에도 ‘아직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도대체 얼마나 좋아하길래 그렇게 쫒아다니는지 궁금해서 그래요’ 라고 가시박힌 말을 들었었다. 하지만 최근 몇 개월 간 선뜻 오피스텔로 먼저 찾아와주고, 가고싶은 것이나 하고싶은 것들을 하나- 하나- 알려주는 모습에 이제 제법 나에게 마음이 많이 기울었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래를 기다리는 1시간 15분동안 생각해보니 모두 김칫국이였다. 한석율은 아직 한참 멀었다. 아니, 어쩌면 장그래의 마음이 더 이상 파도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 우물일지도 모른다.
“그..래…야. 기..다..리는… 동안.. 먹을..것.좀…사..올….까?”
두 손으로 스마트폰을 토독토독 두드리며 입력되는 글자를 목소리를 내 웅얼거리고 있을 때 쯤, 운전석 반대편 창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조심스레 문이 열렸다. 그래였다.
“그래그래 장그래- 배고프지? 밥부터 먹으러갈까?”
“사무실에서 대충 때웠습니다. 집으로 가죠. 피곤해요”
피곤하단 말이 거짓은 아닌 듯, 예쁜 장그래는 두 눈두덩이를 제 손으로 꾸욱 누르며 시트에 몸을 기댄다. 퇴근하자마자 함께 저녁을 먹을 생각으로 달려왔을 난 생각도 안하냐고 뾰루퉁하려다가도 쉽게 기운을 차리지 못하는 그래의 얼굴에 다시 마음이 쓰인다. 섭섭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냥 그래의 손을 잡으며 환하게 웃어주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기운충전이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었다.
“일은 다 끝내고 내려온거야?”
“밑에서 기다리고 있다는데 어떻게 끝내요? 그러게 오늘은 아니라니깐…”
한 시간 십오 분 동안 꾹꾹 눌렀던 서러움이 다시 스물스물 뚜껑 사이 틈새로 손을 내민다. 짜증이 섞여 미간을 좁히는 그래의 표정에 이젠 정말 웃을 수 도 없다. 마음은 조금 아프지만 지금 이 아픈 구석을 말하지 않으면 눈치없는 장그래가 자꾸 아픈 곳에 망치질을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좋아하는 마음을 고백하는 것 보다, 미래를 약속하는 것 보다, 과거를 조금씩 알아가는 것 보다 오늘처럼 서운한 마음을 내비치는게 더 어렵다. 목구멍이 꽉 막힌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하나 그래의 얼굴을 마주보고 입만 벙벙-거리고 있는 나와 눈이 마주친 장그래가 살짝 고개를 숙이더니 먼저 입을 연다. 또 어떤 날카로운 말이 나오려나 싶어 가슴이 저려올랑- 할 때 쯤.
“많이 보고 싶었잖아요… 밑에 없으면 참아라도 볼텐데..”
저려오려던 가슴은 다시 아지랑이가 간질간질 피어오른다. 거울로 볼 순 없지만 붉어진 그래의 귀끝처럼 내 얼굴에도 꽃이 핀 듯 열이 난다. 아마 입꼬리도 끝을 모른 채 올라가 있나보다. 흐아..하.하하 이상한 바람빠지는 소리만 내뱉었다. 오른손으로 주먹을 쥐고 솟구치는 광대를 주저 앉힐려해도, 삐에로는 날아오른다- 뿅! 살랑이는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그래는 제 왼손과 나의 오른손을 고쳐잡고는 두 눈을 마주친다. 인어공주의 비늘이 박힌 유리알같은 눈동자는 보고싶단 말이 거짓이 아니였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막 내 손을 고쳐잡은 그래의 손이 무색하리 만큼 손을 쑥- 빼내어 장그래의 뽀얀 두 볼을 감싸 안았다. 살짝 추운 밖의 날씨 덕에 장그래는 내 손이 더 따듯하게 느껴질 것이였다. 부끄러워 피할만 할텐데도 오히려 ‘날 잡아잡숴요-’ 하는 듯 더 또렷이 눈을 마주보는 그래에게 눈가에 주름이 지도록 웃어보이며 얼굴을 가까이 마주했다.
너른 이마에 한 번, 쪽. 사내 다운 눈썹 뼈에 쪽. 동글동글한 콧봉오리에 쪽. 마지막으로 꿀 바른 듯 달짝지근한 두 입술에 쪽-.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말캉한 혀가 입안을 휘감았다. 어금니부터 차례대로 작은 진주를 쓰담듯 살살 간지럽혔다. 윗 천장을 톡톡 건들이다 방금 전 양손으로 볼을 감싸안은 것처럼 혀 밑을 쓸어올리자 그래가 ‘흐응’하며 기분좋은 소리를 낸다. 더 이상 스킨십의 진전은 없는, 어찌보면 가벼운 키스였지만 차 안은 민들레꽃이 만발했다. 그래를 집에 데려다주는 길. 그래는 제 왼 손이 너무 심심해 운전하고 있는 나의 오른손을 민들레 꽃씨가 살랑살랑 지나가듯 간지럽혔다.
“그래야”
“네?”
“그래도.. 나 사랑하지?”
의심이 아닌 확신이 담긴 질문. 그래는 답이 없었다. 환한 미소로 답을 대신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