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취조실 안 천장에 매달린 조명 하나에 의지한 두 인영이 나란히 마주 앉아있다. 그래는 처음 보는 이 낯선 어둠에 저절로 어깨가 움추려듦을 자각했다. 금방이라도 자신을 잡아먹을 것 같은 이 어두움과 사방을 둘러 싼 시멘트 벽, 그 벽 구석구석 맺힌 곰팡이들이 내뱉는 퀘퀘한 공기, 그래를 끊임없이 벽으로 밀어붙이는 거친 침묵. 그리고 톡,톡,톡- 맞은 편 짙은 쌍커풀의 두 동공이 저를 금방이라도 창으로 찌를 것처럼 노려봄과 동시에 손가락이 테이블에 부딛쳐 만드는 규칙적인 소리에 그래는 등을 곧추세웠다. 


장그래? 흠.. 특이한 이름이군. 자신의 턱을 매만지는 손가락이 꽤 두툼하다. 그는 또 다시 입술을 열었다. 난 총독부 보안과 한 석율, 반가워. 내미는 손에 상대방은 한치의 미동도 없다. 알고싶지 않습니다. 그래? 그럼 지금부터 질문에 대답이나 잘 해. 그렇지 않으면 날 알고싶지 않아도 알게 될 수 밖에 없으니깐. 


총독부 발령 후 이젠 꽤나 익숙해진 취조. 마주보고선 타자기를 타닥타닥 두드리다 질문에 끈질기게 답을 하지 않으면 몇 차례 뺨을 때리고, 이따금 저에게 욕지거린 내뱉는 정신 나간 이들에게는 구둣발로 명치를 짓이겨주고 나면 나머지는 제 밑의 사람들이 해결했다. 취조실 문 밖에서 거센 신음이 들리기도 했지만 상관할 바 아니였다. 그래서 사실 이번 취조도 석율에겐 여타 일과와 다를 것 없는 가벼운 업무 중 하나라 생각했다. 이미 주요 범인은 체포되었고 공범의 명단도 대략 확보가 된 상태여서 그리 강도 높은 취조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질문에 묵비권을 임하는 인물이 있다는 소식에 귀찮은 표정으로 뻐근한 목을 양옆으로 기울이며 취조실로 향한 석율은 어두운 취조실 안 조명의 빛이 반사해 만들어내는 새하얀 얼굴을 보고서야 어쩌면 오늘 퇴근이 조금 늦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주앉아 본 얼굴은 멀리서 봤을 때 보다 더더욱 뽀얗다. 흰 얼굴이 조명 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 제법 남자답게 튀어나온 눈썹뼈와는 대조적으로 맑은 유리창을 박은 듯 물기 고인 눈망울이 꽤나 예쁘장하다. 뽀얀 속살 아래로 높은 산처럼 솟아오른 코는 강직한 성정을 보여주는 듯 했고 앙 다물린 도톰한 입술에서 고집스러움이 느껴졌다. 이 모든 것들이 석율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들이었다. 



“그래, 우정국엔 왜 왔지?”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네가 하고싶은 걸 하라고 이 자리에 널 모신게 아니야” 


석율은 침착했다. 눈 앞에 하얀얼굴이 아니였다면 이미 거친 손찌검이 날라갔을 것이다. 허나, 석율은 마주보고 눈을 맞추는 것에 재미를 느끼는 것 마냥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반복되는 질문에 돌아오는 것 또한 반복되는 대답이였다. 


“솔직히 말해. 네 임무는 뭐였지?” 
“그런 것 없습니다. 전 그들과 한 패도 아닐뿐더러 오늘 그런 행사가 있는지 조차 몰랐습니다.” 
“그럼 도대체 왜 그 시각 우정국에 있었을까” 


끝을 알 수 없는 줄다리기였다. 석율은 같은 말만 반복해대는 그래의 대답에 조금 갑갑함을 느끼며 제 목의 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사실 그 시각, 우정국에 일반인이 올 이유는 하나다. 편지를 보내기 위해. 허나 그 쉬운 대답을 쉽게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장그래란 자의 고집이 이 게임을 쉽게 끝날 수 없도록 한다. 좋아- 그렇게 어려운 대답이라면, 어떻게든 듣고야말지. 장그래의 앙다문 입술이 호기심이란 폭탄에 불을 지핀다. 석율은 그래가 앉아있는 의자 앞으로 다가갔다. 점차 좁아지는 둘 사이의 간격에 그래의 마른어깨가 숨소리에 맞춰 들썩거린다. 긴장했군. 석율은 제 얼굴을 그래의 얼굴에 한 뼘도 안되는 거리에 두곤 끊임없이 눈을 맞춰왔다. 짙은 눈빛이 그래의 목을 조른다. 하지만 그 눈빛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는 강렬한 석율의 눈빛에 목 뒤에서 정수리까지 오도돌 소름이 이렀다. 등 뒤로 땀방울이 맺혀 흐르는 것이 짜증스럽게 간지러움과 따가움을 동반했다. 


“가까이서 보니 꽤나 예쁘단 말이지” 
“......” 
“이 예쁜 얼굴로 무슨 꿍꿍이를 숨겨두는거야, 응?” 


석율이 말을 할 때 마다 나오는 날숨이 그래의 코 밑을 간지럽힌다. 참을 수 없는 공기의 생동감에 그래는 고개를 틀었다. 석율의 비웃음이 날아들었다. 큭..뭐야. 내가 입을 맞출까 두렵기라도 한거야? 석율은 그래의 눈동자를 깊이 바라보았다. 어찌나 맑은지 이 어두운 한 칸 방 안에 제 얼굴이 오롯이 비춰진다. 허나 그 형상은 그래의 두 눈동자가 시선을 둘 곳을 잃어 작은 미동을 보이면서 이내 깨져버리고 말았다. 


“좀 떨어지시죠” 


그래는 석율의 뺨을 제 손으로 밀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쌓였지만 감정보단 이성이 빨라 다행이라 여겼다. 코 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한석율이란 작자에게 고분고분 하고싶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손찌검을 할 순 없는 노릇이였다. 어쨌건 한석율은 이 공간 안에서 갑이였고 그의 지시 한마디에 옥에 갇힐 수 도 있는 문제였다. 앙다문 입술과 꼿꼿하게 세운 척추로 숨길 수 있었지만 사실 그래는 지금 이 공간과, 제 앞의 석율이 두려웠다. 인정하긴 싫지만 


정장의 자켓을 벗어버린 석율은 희고 얇은 셔츠 하나만을 걸친 상태였다. 약간 작은 듯 팔에 달라붙어있는 천들이 울퉁불퉁한 팔과 어깨 아래로 이어지는 가슴근육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래와 얼굴을 맞부딛치고 있느라 숙였던 허리를 한 번 곱게 피더니 단단한 한쪽 팔을 들어 그래의 멱살을 잡아내 일으켰다. 순식간에 기도가 막힌 그래가 흡! 하고 괴상한 소리를 냈다. 혼미해진 그를 의자 밖으로 이끌어낸 석율은 쾌쾌하고 차가운 벽 한 쪽에 그래의 등을 밀쳤다. 윽, 그 힘이 너무 셌던 것일까. 이미 한 차례 고통을 맛 본 그래는 아려오는 등에 다시 한 번 인상을 찌푸렸다. 석율은 아랑곳하지 않고 멱살을 잡고있지 않는 다른 팔로 그래 얼굴 옆 벽에 손을 짚었다. 냉기가 석율의 손을 고스란히 타고 내려왔다. 


“어쩌지, 떨어지기 싫은데” 


이미 취조실의 공기와 석율에게 압도당한 그래가 석율을 밀치기엔 역부족이였다. 그래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한 석율은 멱살 잡던 손을 풀었다. 하아- 여태 숨이 모자랐던 것 일까. 몰아내치는 날숨이 석율의 목부근을 간질인다. 석율은 제 중지와 검지의 등으로 그래의 하얀 볼을 쓸어보았다. 꼭 분이 묻어 나올 것만 같다. 이마를 덮은 앞머리를 옆으로 넘겨주자 적당한 넓이의 남자다운 이마가 드러난다. 분명 방금 전까지는 예쁘다고만 생각이 들었는데, 훤한 이마를 드러내자 그와 이어진 톡 튀어나온 눈썹 뼈와 우뚝한 콧선이 꽤나 남자답다. 그럼에도 맑은 눈은 툭 치면 곧 울 것처럼 여린 것이 석율은 참 묘하단 생각이 들었다. 


장그래. 그래, 낯선 이름임에도 낯설지 않은 이 분위기. 하얀 얼굴도, 꽤나 마른 어깨에 바르게 선 허리와 거칠게 몰아붙이는 석율이 버거운 듯 내쉬는 한숨 섞인 소리. 그 익숙함에 석율의 한쪽 눈썹이 꿈틀댄다. 석율의 힘에 굴복할 수 밖에 없으면서도 일본의 개인 저를 혐오하듯이 쳐다보는 저 맑은 눈이 낯설지 않다. 꼭 수 년 전 저를 보던 그 눈과 너무나도 닮았다. 미친 새끼들! 그래의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석율은 냅다 그래의 명치에 제 주먹을 꽂았다. 윽. 처음 느껴보는 고통에 그래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허나, 찌푸린 미간과 살짝 벌어진 입술은 석율을 더더욱 자극시킨다. 잠깐, 아까 주먹에 닿았던 것은 뭐지. 석율은 방금 전 그래에게 주먹을 던지던 순간 느껴졌던 손등의 촉감을 기억해냈다. 단단한 강도가 아닌 것이 위협이나 호신을 위한 무기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그럼에도 맨 살 보다는 조금 단단한 무엇인가가 그래의 명치 앞에 조그맣게 숨어있다. 뭐지. 


석율은 제 상체를 그래에게 좀 더 밀착시켰다. 가슴팍 밑에 뭉뚝히 튀에나온 것이 느껴진다. 한 편, 벽의 냉기와 석율의 열기 사이에 끼인 그래는 온 몸의 말초신경이 곤두서는 것이 느껴졌다. 아직 석율이 충격을 가 한 명치의 고통이 사라지기도 전이였다. 온 몸의 힘이 빠진 그래의 전신은 의지와는 상관없이 밀착되어있는 석율의 몸에 기댈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이쁜이가 뭘 숨기는걸까. 그런 것 없...! 석율은 그래의 입이 열리기가 무섭게 제 입을 끼워맞췄다. 열린 입 사이로 당황한 그래의 혀가 갈 곳을 잃고 떠다닌다. 그 움직임에 더 자극받은 석율의 혀가 그래의 혀 밑을 달큰하게 쓸었다. 흣. 생경한 자극에 달아오르는 것은 본능이였다. 제 입을 타고 나오는 소리에 당황한 그래가 고개를 격하게 흔들며 석율의 미끄덩한 살덩이를 거부하자 석율은 그래의 턱을 조악하게 쥐었다. 턱이 뻐근했다. 결국 그래가 저항할 수 있는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아! 석율의 아랫입술 왼쪽에서 짙은 굵기의 핏물이 흘러내렸다. 


화가 석율의 온 몸을 휘어 감았다. 입술 한 쪽에서 나는 비린 내를 혀로 한 번 축인 뒤 석율은 다시한 번 손을 올렸다. 한 손은 그래의 양손을 휘어잡아 벽에 붙였고 다른 한 손은 그래의 몸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흰 뺨에서부터 느릿하게 그래의 솜털 하나까지도 놓칠 수 없다는 듯 석율의 촉각은 그를 느꼈다. 뺨에서부터 목을 타고 내려와 쇄골을 지분거리자 다리에 힘이 빠진 그래의 몸이 살짝 내려앉았다. 쇄골의 탐색을 마친 손은 다시 한 번 아래로 흘러들어 그래의 가슴팍을 지분거렸다. 섹스를 할 때처럼 격한 움직임이 아니였다. 손가락하나 하나에 힘을 실어 간질이듯 옷 위로 매만져오는 움직임은 그래의 감각신경을 일깨우는데에만 집중하는 듯 했다. 그 의도에 답을 주듯 얇은 옷감 사이로 느껴지는 자극에 익숙하지 않은 그래의 돌기가 올라왔다. 흣, 뭐 하시는겁니까. 그만..하세요. 석율은 제가 몸을 빼면 땅으로 주저 앉을 그래의 다리 사이로 저의 다리를 밀어넣었다. 단단한 허벅지로 그래의 중심이 느껴진다. 살덩어리의 온기를 느끼며 다리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비벼오자 그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수치심에 눈도 뜨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인 그래가 마지막 힘을 짜내 온 몸으로 석율을 밀어내려는 찰나, 석율이 그래의 윗 옷 매듭을 풀어버렸다. 툭- 하고 무언가가 석율의 발등 위에 내려앉았다. 


품 속의 것을 들키지 않게 몇 번을 접었는지 편지는 한 덩어리가 되어 꽤나 묵직했다. 접힌 편지를 펴보자 봉투 위로 낯선 주소와 [수신인; 장백기] 라는 메모가 적혀있다. 그 내용물 또한 두둑해 굉장히 중요한 정보들이 담겼거나 혹은 중요한 마음이 담긴 편지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천박한 년” 
“......” 
“고작 이 것 때문이었나?” 
“......” 
“편지는 잘 부쳐주도록 하지.” 
“.....” 
“앞으로 잘 부탁해” 


쾅, 하는 문소리와 동시에 그래는 더럽고 차가운 취조실 바닥에 주저앉아 널부러졌다. 













취조실 문 앞을 지키고 서 석율이 나오길 기다리던 순사는 석율이 나오자 그 뒤를 따랐다. 석율은 그래에게 빼앗은 편지를 다시 제 주머니 안으로 우겨넣었다. 순사는 물었다. 그것이 뭔가요? 신경 쓰지마. 순사가 뒤에서 보내는 샐쭉한 시선에 뒷통수가 따가웠다. 


“장그래라는 자, 조사해봐. 사는 곳부터 직업, 출신, 주변인물 모조리.” 
“예. 감시도 붙일까요?” 
“그건, 따로 인력 필요 없다. 내가 종종 뒤를 따라보도록 하지. 아, 아직 뚜렷한 활동이 없으니 리스트에 올리지 않도록” 
“예” 
“아, 그리고 장백기라는 자를 아나?” 












제 자리로 돌아온 석율은 방금 전 취조실에서의 기억에 다른 모든 업무를 잠시 중단했다. 말간 얼굴에 비친 제 얼굴을 보자 급격히 화가 치솟았다. 누가 봐도 과잉된 취조였다. 후- 한 숨을 쉬던 입에 연초를 물었다. 불을 붙였지만 떠오르는 잡념에 입술과 이로 끝을 짓이기기만 할 뿐 이었다. 방금 전 까지 석율은 취조대상에게 분풀이를 하고 나왔다. 평소였으면 몇 번의 냉담한 발길질로 끝낼 문제였다. 허나 제 화를 억누를 수 없어 벽에 밀치고 명치를 가격했다. 그래, 백번 이해해서 여기까지는 용납할 수 있었다. 허나 방금 전에는, 입을 맞추고 그의 타액을 모조리 씹어 삼켰다. 흥분돼서 끙끙되는 모습을 즐기는 사람 마냥 그의 신경에 자극을 주었다. 미친새끼들 욕까지 내뱉었다. 평소 석율이 표정 변화 하나 없이 가볍게 폭력을 가하며 취조를 하던 것을 알던 사람들이 보았더라면 놀라 까무러쳤을지도 모른다. 석율은 기억을 되짚었다. 미친새끼‘들’이라니. 장그래를 보면서 누군가가 떠올랐던 것 같기도 하다. 누구였더라. 무엇을 보고 그리 흥분했었나. 낭창한 허리였나, 가녀린 어깨였나, 혹은 뽀얀 피부였을까 붉은 입술이였을까. 그래, 눈이였다. 투명한 유리창을 빼다박은 맑은 눈. 허나 그 속에 저를 향한 경멸과 혐오로 가득차서 금방이라도 저를 향해 일본의 개라며 욕지거리를 내뱉을 것 같은 눈, 분명 그 것은 박진우의 눈이였다. 

























총 모양을 흉내낸 나무조각 따위로 훈련같지 않은 훈련을 마친 백기는 상식의 방으로 향했다. 병사들은 만족스럽지 못한 훈련에 투덜대기도 했지만 무기를 살 자금이 부족한 형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아 이내 잠자코 숙소를 향했다. 조선 땅에서 이 곳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바닥이 꽝꽝 얼어있었는데 어느새 새싹이 피더니 이제는 훈련을 조금만 하면 등에 땀이 나기도 한다. 


똑똑- 노크 소리에 들어오라는 상식의 목소리가 들리자 백기는 문을 열었다. 책상에 걸터앉아 펼쳐놓은 책들을 뒤적거리던 상식이 고개를 들었다. 오늘 도착한 편지 없나요? 또 그 물음이냐 녀석아 상식의 타박이 이어졌다. 편지든 뭐든 도착하면 바로 전해준다니까! 다른 병사들은 아무 말도 없구만 왜 너만 유난이야 자식아. 하하.. 민망해진 백기가 흰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보였지만 눈이 접히지 않는 미소를 알아챈 상식이 백기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왔다. 또 너만 못받은게야? 백기가 목 뒤를 글쩍였다. 이내 상식은 말을 돌렸다. 


전략을 짜려해도 무기가 없으니 원, 힘들지? 아닙니다. 지난 한 달 여간 이 곳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일본군 주둔지와 그 주변 지형을 파악해뒀습니다. 명령만 주시면... 글쎄 그 명령을 무기가 있어야 줄 것 아니야. 상식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조선에서 자금조달을 받기로 했다. 직접 받아갈 자가 필요해. 허나, 이 것을 왜 저에게... 왜 긴 왜야 이 답답한 놈아. 조선으로 가란 소리지! 그렇지만 전 여기서 전략을. 허허 이놈보게. 여기 머리쓰는 놈 너만 있는줄 알아?! 상식은 백기에게 큰 소리를 쳤다. 어디서 거만하게 혼자 머리쓰는 척이야. 무기 살 돈 만 있음 속전속결이야. 전략은 해준이가 주도해서 잘 할테니 돈이나 받아와. 그 쪽에서도 다 준비해놨으니 돈이나 달라는데 허허, 돈을 구해와 자식아! 


상식이 내민 종이의 요지는 이러했다. 한밭 땅 계룡산 근처의 한 가문에서 오랫동안 묵혀 온 돈을 좋은 곳에 쓰고싶단 의지를 밝혔고 그 돈을 만주로 들고 갈 사람이 필요하다 했다. A가 –조직 내부에서도 보안을 위해 익명으로 활동한다- 대전에서 돈을 받아 경성으로 올라오면 빠른 일시에 그 것을 받아 만주로 들고 가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물론 돈은 직접 받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 몇 명의 인물들을 거쳐야했고 그 암호와 차림새도 쓰여져 있었다. 종이를 가슴팍에 접어 넣은 백기는 상식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놀으라고 보내는 거 아니다, 임마. 이거 진짜 중요한거야. 우리 부대의 존폐가 달렸어. 대답을 종용하는 그의 눈빛에 담긴 의지에 백기는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잘 다녀올게요. 말은 다르게 했을지라도, 매번 조선 땅에 꿀단지라도 숨겨놓은 것처럼 조선에서 오는 소식 하나에 초조해하는 백기를 위한 배려이자 임무를 잘 수행할 것이라는 믿음을 알 수 있었다. 상식을 향한 백기의 존경심이 한층 더 두터워졌다. 










+)
 






2층 계단이 어수선했다. 제 방문 앞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석율을 쳐다보던 석율의 양모는 잰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나무계단이 삐걱댔다. 뭐하는거니? 한창 제 짐을 꾸리던 석율이 대답했다. 독립할꺼에요. 그녀는 기가 찼다. 이제 좀 조선생활에 적응했다 이거야? 비음을 내며 한껏 석율을 비꼬는 목소리에 그 또한 기가 찼다. 어머니 그 콧소리 듣기 싫어서요- 



잠자코 1층 거실에 앉아 신문은 보던 석율의 아비가 입을 열었다. 여자 찾아서 독립할 생각은 안하고 젊은 청년이 어째서 벌써 독거노인 행세를 하려해? 옆에서 쫑알대던 어미도 한 마디를 보탰다. 그래, 석율아. 아니 대체 왜 여태 들어온 선자리는 다 마다하고. 아닌게 아니라 혼기가 다 찬 석율에게는 사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선자리가 들어왔다. 조선인 중에서는 드물게 대자본을 소유한 가문, 동경유학 코스를 마치고 조선총독부의 고위직을 따낸 엘리트에게 여럿 가문의 시선이 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허나, 그런 선자리를 물고 온 어머니에게 석율은 딱 잘라 말했다. 제 야망을 고작 그런 집안으로 만족하라는거에요? 철없는 거절이 아닌, 욕심을 내고싶다는 그 말에 그녀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집은 내가 알아봐 줄테니 그 곳으로 가거라. 네 봉급에 알아본 곳이라고 어디 형편 있겠어. 석율은 제 아비에 명령에도 아랑곳 않고 짐을 쌌다. 빙고- 그 말을 기다렸지. 집 구하시면 연락해요 열쇠 찾으러 올게요. 바리바리 양 어깨에 짐을 맨 석율이 현관을 벗어나 대문으로 걸음을 옮기자 뒤에서 어머니가 소리쳤다. 

“석율아, 해군 대장님 여식이 너와 비슷한 또래래! 자리 한 번 마련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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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4. 21. 20:16 · RSS · 트랙백 · 댓글달기 · 연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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