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가 몸을 일으켰을 때 이미 유리 창 안으로 쨍쨍한 해가 그의 눈 위를 괴롭히고 있을 시간이었다. 상체를 들어 올릴 때 느껴지는 허리의 통증에 오른 손의 주먹으로 허리를 통통 두들겼다. 낯선 잠자리, 딱딱한 바닥에 도톰한 요를 깔고 잔 세월이 이십여년이다. 높고 폭신한 침대라는 것이 그래에게는 많이 어색하다. 그 덕에 밤새 허리에 나앉은 고통으로 그래는 신음과 함께 아침을 맞이했다. 


잠 덕분에 몽롱했던 정신을 겨우 차리고 나서야,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였는지 상기했다. 제 집과는 달리, 고급스러운 상아색에 황금색 곡선 무늬가 새겨진 벽지가 발린 4개의 네모가 자신을 둘러 싸고 있다. 침대 밑의 바닥은 옥으로 깔려, 그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선뜻 발을 딛기도 망설여졌다. 햇살이 파고드는 창문은 다 갈색의 짙은 커튼이 빛을 반기는 냥 양쪽 갈래로 예쁘게 묶여져 있다. 백기와 함께 살면서 시장에서 국밥을 파는 자신이 오가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운 이 고고함. 지난 밤, 울고 불며 가슴팍을 주먹으로 내리치는 저를 끌고 온, 석율의 집이었다. 간 밤 도저히 무슨 정신으로 그를 만났고, 그를 따라 이 집에 왔는지 머리 속에 남는 것이라곤 그를 부여잡고 청승 맞게 울었던 것 밖에 없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니였고, 매를 맞아 정신을 놓아버린 것도 아니었다. 단지 백기와의 다툼이 이렇게 그를 백지 상태로 만들어버렸다. 


네 눈이 날 불렀잖아. 밀려오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움켜쥐었을 때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 지난 밤 그를 원망하는 그래를 보며 그는 말했다. 네가, 네 눈이 날 불렀잖아. 알 수 없는 말들 사이에 흘러나오는 슬픔에 눈물을 흘리던 그래가 꺽꺽 대는 숨을 잠시 멈춘 것도 그 순간이었다. 그래는 처음으로 그의 표정을 오롯이 관찰했다. 항상 비소로 일관하던 그의 입꼬리는 일자로 다물려, 촉촉해진 눈이 저를 노려보는 것을 동조했다. 그 길로, 잡힌 손은 그대로 석율이 이끄는 대로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온 근육이 힘을 잃고 흐물거리는 제 몸은 석율의 손아귀 힘을 이겨내기엔 벅찼다. 이성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미 한 차례 혼을 쏙 빼 먹은 정신 머리는 석율을 부여잡고 땅이 꺼질 듯 울면서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춰버렸고 석율이 자신을 어디로 끌고 가는지 자각할 여유도 없이, 그저 그의 손에 몸을 맡기라고 일렀다. 


그렇게 발을 들인 그의 집. 하나 뿐인 침대에 저를 눕히더니 큰 소음을 내며 그는 방 문을 닫고 사라져버렸고, 어둠 속에서 한 참을 멍하니 앉아있다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자신의 기억이 휘발된 것이 아니라면, 그는 나를 방에 재워두고 밤새 한 발짝도 이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는 휘청 거리며 일어나 방 문을 열었다. 허나, 거실 역시도 그래가 잠들었던 방 안 만큼이나 고요하다. 


“한 석율씨” 

“한석율 나으리?” 

그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혼자 살기에는 꽤 넓은 거실에도 그의 자취 하나 없다. 사방이 적막했다. 이 넓은 공간에 저 홀로 있을 것이라 고는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가 어디 있는지 찾고 싶지만 차마 남의 집을 여기저기 뒤질 수 도 없는 노릇이라, 그래는 조용히 제가 잠들어있던 방 문 앞에 멍하니 발을 붙이고 있었다. 

“장그래 일어났어?” 

다행히 도 다 갈색의 가죽 소파가 놓인 거실 한 쪽 벽으로 난 문에서 석율이 타이의 매듭을 고쳐 잡으며 나왔다. 방금 막 일어난 자신과는 다르게 말끔하게 양복을 차려 입은 그가 다가와 그래의 뒤통수를 살살 눌러준다. ‘까치 몇 마리가 왔다 간 거야.’ 그 앞에 무방비하게 서 있던 그래는 거울도 보지 못하고 방에서 나온 것을 후회했다. 백기라면 이런 자신의 모습도 귀엽게 봐주었겠지만, 눈 앞에 한석율이 자신을 백기와 같은 눈으로 볼 이 만무하다. 


“아, 죄송해요.” 


그의 손짓에 한 발 물러선 그래는 자신의 뒤통수를 제 손으로 쓱쓱 쓰다듬었다. 뒤 머리가 잔뜩 서 있는 꼴이 안 봐도 한석율의 비웃음을 자아낼 만 한 것 이었다. 백기라면,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보며 훤한 이를 드러내 웃어줬겠지. ‘장 그래, 귀여워’ 청량한 웃음 섞인 목소리와 함께 큰 손으로 제 머리를 만져줬을 것이다. 그리고선 그 손이 자신의 볼을 부여잡고 따듯한 입맞춤을 나눴겠지. 그런데, 나는 그런 백기를 홀로 둔 채 집을 박차고 나와버렸다. 혼자 있을 그의 외로움을 왜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것일 까.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그의 어두운 낯빛이 생각나서 그래는 화들짝 몸을 움직였다. ‘가볼게요’ 몰아치는 후회에 그래는 눈 앞에 석율의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눈빛도 알아채지 못하고 그에게 고했다. 


“신세 많이 졌어요. 죄송해요. 먼저 가보겠….” 
“태워다 줄게. 기다려” 
“아니에요. 혼자 갈 수 있습니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문에 못질 해서 가둬 놓기 전에 기다리고 있어. 외투 챙겨 나올 테니까.” 







대문 앞에 세워진 검은 차는 뒷좌석에 다 큰 성인 두 명이면 꽉 찰 정도로 작았다. 붉은 벨벳 천이 덮인 자동차 의자 위에 앉은 그래는 어쩐 지 굳은 표정의 석율이 신경 쓰여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신기하네요. 이런 차 처음 타봐요.’ 어쩌면 석율에게 살갑게 들릴지도 모르는 말들은 다시 그래의 목 언저리로 숨어버리고 좁은 차 안에는 석율이 내뿜는 냉기만이 가득하다. 


“집으로 가면 되지” 
“...... 아니요, 가게로 가주세요” 

부드럽게 움직이는 바퀴가 아직 정비되지 않은 도로 위를 움직이며 덜컹거릴 때 마다 그래는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진동에 새삼스럽게 움찔했다. 창문 너머로 빠르게 지나가는 경성 풍경에 정신을 놓고 창 밖 구경을 하고 있을 때쯤 석율이 입을 열었다. 장백기랑 싸우기라도 했나 봐. 서로 지키지 못해서 안달 난 것들 처럼 굴더니. 어제, 집 나온.….. 



그러나 그가 내뱉고 있던 말은 그래의 말 소리에 의해 묻히고 

“어제는, 죄송했어요.” 
“장그래, 내 말 안 끝났어.” 
“제가 어제, 몸 상태가 안 좋아서… 나으리한테 실수를 범했다면 죄송합니다.” 


움직이는 차는 어느새 큰 도로를 돌아 작은 골목길 사이로 빠지고 있었다. 도로를 거니는 행인들이 시야 뒤로 휙휙 넘어간다. 이제, 몇 개의 모퉁이만 더 돌면 그래의 가게에 도착할 것이다. 


“근데, 어제 했던 부탁은..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내 말 잘라 먹지마. 어제 네가 나한테 했던 말은 들어 줄 수 없어.” 


길이 좁아지자 석율은 차의 속도를 낮췄다. 차 옆의 행인과 비슷한 속도를 유지하며 돌아가는 바퀴. 석율은 창틀에 한 쪽 팔을 기댄 채 신경질적으로 핸들을 쥐었다. 


“왜죠? 감시가 필요해서요. 그럼, 다른 순사가 붙으면 되잖아요.” 
“같은 말 반복하게 하지 마” 
“아니요. 대답 듣고 싶어요.” 
“내려. 다 왔어” 


신경질적으로 밟은 브레이크로 인해 그래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지며 차가 멈췄다. 끼익 거리며 움직임을 멈춘 바퀴는 그래의 가게 앞에서 모래 바람을 일으켰다. 이미 도착한 것을 알지만, 석율의 대답을 듣기 전까진 내릴 수 없다는 듯 엉덩이를 의자 깊게 붙이는 그래의 움직임에 석율의 미간이 좁힐 대로 좁아졌다. 


“제 눈이, 나으리를 불렀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젠장. 낮게 읇조리는 석율의 얼굴에는 온갖 난감함과 짜증스러움이 묻어있었고, 계속되는 그래의 고집에 결국 석율이 먼저 차문을 열었다. 거칠게 바닥을 내딛는 발과 쾅- 굉음을 내며 닫히는 문에 그래는 지레 겁을 먹고 움찔거렸다. 차에서 몸을 내린 석율은 반대편 조수석의 문을 열고 선 그래를 쳐다봤다. 허나 여전히 고집스럽게 엉덩이를 의자 깊게 붙이고 있는 그 모습에 석율은 결국 화가 폭발했다. 결국 그는 지난 밤 그랬던 것 처럼 자신보다 묘하게 얇은 그래의 한 쪽 팔을 쥐고 선 그를 억지로 차에서 끌어내렸다. 힘을 주는 몸짓에 오대오로 갈린 그의 앞머리가 흐트러져 이마를 가린다. 



“그게 무슨 뜻인지 궁금해?!” 


그래의 답을 듣기 위한 물음이 아니었다. 차 밖으로 끌려 나온 그래의 몸을 밀어 붙이고 선 그의 입술을 집어 삼킬 듯이 물어 뜯는 석율에게, 그래의 뜻은 중요하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부딪쳐 오는 입술에 정신을 잃을 듯 휘청이는 그래는 차체에 몸을 기댔고, 석율은 그에게 제 하체를 밀착 시켰다. 거친 모래 바람이 휩쓸고 간 자리에 석율은 그래를 그 바람처럼, 건조하게 몰아 부쳤다. 제 입안을 헤집는 뱀 같은 촉감에 소름이 끼쳐 그래가 고개를 도리 도리 흔들며 저항하자 석율은 그에 대한 답으로 한 번 더 그래의 입술을 찢을 듯 잇새로 꾹- 눌렀다. 격한 마찰로 입 안에서 느껴지는 비린 핏내가 나고 서야 석율이 그를 놓아준다. 

짝- 이어지는 마찰음은 보나 마나, 뻔할 뻔 자 였다. 그래가 때린 뺨이 발갛게 부어오른 석율은, 개의치 않은 미소를 띄우며 그래에게 시선을 맞췄다. 

“무슨 뜻이냐며, 이제 알겠네-” 

석율의 뺨을 때리느라 알알한 오른 손을 꾹 움켜 쥐고서 그래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석율을 떠났다. 등 뒤로 태연한 목소리가 들린다. ‘오늘부터 다시 감시 시작이야. 점심 맛있게 해놔-’ 

겨우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입맞춤 한 번에 무너져버렸다. 후으- 깊은 한숨을 몰아 내쉬지만 여전히 폐 깊숙이 그가 불어넣은 숨이 조각조각 박혀있는 것 같아, 그래는 가슴을 통통 쳤다. 그래, 태연해져야 한다. 한 석율. 더 이상 그를 피할 수 없다면 아무렇지 않게 그를 볼 수 있어야 했다. 자신을 굴복 시키려는 냉담한 표정과, 가소로운 시선. ‘조선인’이라고 저를 무시하는 말투. 모두 아무렇지 않게 받아드릴 수 있었다. 남자를 사랑하는 제 ‘연애’를 흥미 거리 삼아 쉽게 입에 올리는 희롱도. 그러나 

‘네 눈이 날 불렀잖아’ 어딘 듯 화가 나 있는 목소리. 

그래는 모든 것을 태연하게 받아 들이자고 다짐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 눈빛을 도저히 뇌리 속에서 지우지 못했다. 지난 밤의 그 눈빛. 그리고,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느냔 물음에 답해왔던 거친 입맞춤. 그 입맞춤이 정말, 자신의 물음에 대한 답이었을까. 머리를 쓸어 넘겨본다. 제발, 아니기를 바라면서. 




드르륵- 미닫이 문이 열렸다. 자물쇠를 잠그지 않았었나? 몇 일간 들리지 못했던 가게인데도, 생각보다 문이 미끄럽게 열린다. 지난 몇 일 사이 돌보지 못한 가게 일로 오늘 아침은, 평소보다 준비 시간이 더 길어질 것이란 생각에 그래는 서둘러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허나 가게를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것은, 유리 문 바로 앞 탁상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제 연인이었다. 


“..배..백기야.” 
“이제 오네” 


슬며시 고개를 드는 얼굴은 핏기가 가시고 창백한 거죽만 남은 듯 쾡하다. 부르튼 입술은 원래 색이 무엇이었는지도 잊을 만큼 허옇게 말라 붙어 백기가 입을 가로로 다물 때 마다 서로 부딪쳐 거슬거리는 것이 한 눈에 보인다. 그는 초췌했다. 

“경성 바닥을 다 뒤졌어. 네가 있을 만 한 곳은 다.” 
“......” 
“근데, 저 새끼랑 같이 있었어?” 


백기가 손을 들어 가리키는 곳은 그저 지나가는 행인만 존재해 휑할 뿐 이였지만, 백기가 바로 그 곳을 방금 전까지 지켜보고 있었음은 너무나 도 자명했다. 


“백기야. 오해야.” 
“...오해” 


백기의 목젖이 가볍게 떨려온다. 어떻게든 분노와, 눈물을 참아보려는 그의 노력은 부들거리는 입술로 한 눈에 알아챌 수 있다. 간 밤, 탁상에 엎드려 혼자후회와 반성의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쉽게 그래를 놓쳐선 안된다고 홀로 다짐했다. 어떻게 해서든, 내 연인은 나의 것. 풀잎이 해가 없이 말라 죽어가듯, 내 삶도 네가 있어야만 했다. 

해가 뜨고, 행인들이 드나드는 소리가 들릴 때 쯤, 낯 선 엔진 소리가 가게 앞에 멈춰 섰다. 이런 골목까지 들어올 만한 차량은 거의 없기 때문에 백기의 이목을 집중 시켰다. 헌데, 그 차에서 나오는 것은 자신의 지난 밤을 메마르게 만들었던 장본인 장 그래. 그리고, 그와 함께 있어서는 안될 한석율. 




“처음으로 널 좋아하는 내가 미웠어. 네가 없어지고 나서야 날 기다렸던 네 마음이 이해가 가서. 그래서 뒤늦게 너 찾았어. 미안하다고 말해주고 싶었어. 네 외로움 알지 못했던 나 용서 해 달라고. 네가 용서 못하겠다면 무릎이라도 꿇으려고. 근데 어딜 가도 넌 없더라.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여기에 왔는데. 여기도 없더라.” 
“......흐윽..백기야. 아니야.” 
“밤새 여기 이렇게 앉아서, 널 기다리면서… 너에게 뭐라고 용서를 구하나 곱씹고, 내가 없을 때의 네 흔적을 찾아보고... … 근데, 그냥 내 착각이었네” 


쏟아붇는 백기의 배신감 어린 목소리에 그래의 눈에 눈물이 차오른다. 결국 눈물은 물줄기를 만들어냈고 그래의 얼굴을 조금씩 물들인다. 

발 끝에 있는 피가 역류한다면 이런 기분일까. 머리 위에 구멍이 뚫려 있다면 그 피가 아마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을 일이다. 한석율에게서 그래의 이름이 나왔을 때, 꿈이겠거니 싶었다. 그래가, 한석율을 알 리가 없다고.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점점 현실감이 불어 넣어질 때는 저를 놀리기 위한 수작이라고 믿고 싶었다. 투쟁을 하는 자신을 압박하기 위해서 뒷 조사를 마친 그가 꾸며낸 말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래와의 대화 속 그가 등장했을 때, 자신이 한석율의 이름을 입에 올렸을 때 그래는 ‘그가 누구냐’ 라고 묻지 않았다. 그저, 그 사람의 이야기는 할 필요 없다는 처연한 표정과 함께 고개를 돌렸을 뿐이었다. 
그 때 나를 덮쳐오는 배신감은, 떠나는 그래의 뒷모습을 잡을 힘 마저 모조리 앗아가 버렸다. 멍청하게도, 그를 어떻게 알게 됐냐.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나 하는, 정작 중요한 질문들은 어두운 암실로 자취를 감춰버리고 영양가 없는 질투만 나 자신이 된 듯 몸을 잠식 시켰다. 사라진 이성의 끈은 네가 내 옆에 없다는 것을 직시한 순간 날 잠식 시킨 그 것들을 회초리질 했다. 


그래서 겨우 널 찾아 나섰지만, 돌아온 것은. 


유리 문 너머로 너와 입을 맞추고 있는 한석율의 뒤통수. 그리고 눈물 범벅이 돼선, 오해 라고만 하는 너의 얼굴. 


“흐윽...흡….아니야.” 
“...” 
“흑..우연 이였어. 우연히 만난 거야…” 


땅으로 떨어지는 그래의 눈물은 그래를 땅으로 잡아 끌고, 고꾸라져 꺽꺽 거리는 그래는 결국 나무로 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회 갈색의 나무는 눈물방울의 모양대로 진갈색으로 물들어간다. 


백기를 붙잡고 하나하나 말해주고 싶다. 어제 밤, 어떻게 그와 함께 있었고 그와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오해할 일은 애초에 없다. 처음부터 그는 나에게 어떤 존재도 되지 못했다. 그러나, 눈 앞에서 격한 입맞춤을 보여주고 나서도 쉽게 그를 부인하지 못하는 이유. 

이미 헝클어져, 풀려할 수록 더더욱 엉켜버리는 가는 실타래처럼 ‘한석율’에 대해 이야기 하려 입을 뗄 데 마다 파도처럼 휘몰아치는 지난 시간들이, 그냥 그래의 입을 닫게 만든다. 그와의 만남부터, 네가 조선 땅에 없던 날들, 그리고 너와 다툰 후 우연한 그와의 만남 까지 어느 하나도 네가 존재하지 않는 시간들이 없다. 

그와 나의 시간은 언제나 네가 그 시작점 이자 불가결 이여서. 그래는 그냥 홀로 빌었다. 백기가 자신을 믿어주기 만을. 


“가볼게” 


지난 밤 그 눈빛처럼 여전히 차가운 목소리였지만, 그래는 그 한기에 놀랄 겨를도 없었다. 지친 그의 한 쪽 다리를 부여잡고, 떠나려는 그 발걸음이 무겁도록, 너무 무거워서 쉽게 띄지 못하도록 그를 잡는 것이 최우선 이였다. 


“가지마” 
“.....내가 널 어떻게 믿어” 

미약한 진동이 섞인 목소리가 실내의 공기를 울린다. 그 진동에 맞춰 그래의 흐느낌이 더해져 갔다. 여전히 백기의 한쪽 다리를 붙잡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래. 한 쪽 다리를 그래에게 내어준 채 바짓단이 젖어가는 것 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가슴으로 울고 있는 백기는 차마 그래의 얼굴을 볼 수 없어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한껏 움추려든 어깨 위로 쌓이는 안쓰러움과, 끊어진 이성을 탓하는 배신의 감정이 한데 뒤섞여 백기의 심장박동을 울렸다. 


“넌... 나 안 붙잡았잖아. 난 너 붙잡을 거야.” 

내가 없을 때 처음으로 내 외로움을 이해했다며. 백기야, 제발. 지금 네가 사라지면 난 또 그 끔찍한 외로움에서 몸부림쳐야 해. 

겨우 소리 내 내뱉은 말 때문에 그래는 더 거친 울음을 내뱉었다. 이런 비겁함으로 널 잡는 날 용서해줘. 


울먹이는 목소리에 섞인 원망, 처음으로 그래의 입에서 나오는 ‘외로움’이란 단어. 자신의 부재 속에서 떨고 있었을 가냘픈 그래의 음성은 끊어진 이성의 끈을 겨우 붙잡아 놓는다. 자신의 발치에 매달린 조악한 주먹을 보며 백기는 지난 밤을 회고했다. 그토록 사랑하는 이의 외로움조차 간파하지 못했던 자신이 무슨 자격으로 그를 떠날 수 있단 말인가. 이 또한 그래를 믿지 못했던 스스로에게 채찍질하기를 겁내는, 성찰의 부재였다. 그래에게 남자는 저 밖에 없음을. 한석율이 자신의 빈 자리를 채우고 있다 하더라도 그 것은 채워진 것이 아님을. 그리고, 설령 그래가 먼저 한석율을 찾았다고 한들 저 마다의 이유가 있을 것임을 믿었어야 했다. 

발끝에 닿은 온기가 여전해서 백기 역시 주저 앉을 수 밖에 없었다. 둘은 그렇게 한참 동안 스스로에게 화살을 겨냥하며 서로를 부여 안고 울었다. 눈물이 쏟아내는 열기 안에서 백기는 다짐했다. 절대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이 먼저 그래를 떠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
 
훤한 아침, 유리 문 안 쪽에 그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입을 맞춘 것은 경고도 도발도 아니었다. 아침부터 저를 향해 앙버티는 장그래를 위협하는 행위도 아니었다. 그저

‘제 눈이, 나으리를 불렀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물음에 대한 답을 주는 것이었다. 허나 장 그래가 준 대답에 대한 회신은 ‘짝-’ 거친 마찰소리와 알알한 한 쪽 볼이 전부였다. 이러나 저러나 석율에게 그 것은 큰 의미가 되지 못한다. 어떻게든 시야에 가득 찬 석율의 감정을 부정하고자 몸부림치는 그래에게, 애초에 그 질문 따위는 석율의 진심을 듣고싶어 하는 것이 아니였음을 석율 또한 잘 알고 있다. 

석율이 원하는 것은, 숨바꼭질 중 옷 더미 안으로 고개만 콕- 박고 아무도 저를 못찾을거라 확신하는 앳된 아이처럼 석율의 감정을 모른 척 하려는 그래에게 제 감정을 일러주는 것 이었다. 이제, 그래가 숨으려고 했던 옷 더미는 석율이 벗겨버렸고 술래 앞에서 혈혈단신이 되어버린 그래의 행보만이 석율의 유일한 흥미 거리다. 





“나으리, 영성 실업 사장님 댁 여식이 찾아오셨습니다.”

책상 위에 구두 신은 두 다리를 올려놓고 찌라시 신문을 펼쳐보고 있던 석율을 방해하는 목소리에 석율은 인상을 찌푸리며 어깨너비의 신문을 구겨 접었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것은 물론 이거니와 꽤나 큰 종이의 크기 때문에 넓게 팔을 펼치고 있던 석율은 신문을 내려놓으려 자세를 고쳐 잡았다. 시야를 가리고 있던 종이가 슬그머니 내려가고 동시에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얇은 종이 너머 흰 양장을 입은 여인.


“어허, 안영이.”
“오랜만이야.”

여전히 곧은 자세의, 통통하고 흰 볼을 씩- 올려 미소짓는 영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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