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고는 천천히...

 

 

 

쇠철문은 단단했다. 주먹으로 암만 두드리다고 한들 손만 벌게질 뿐, 달라지는게 없었다. 함께 옥을 나눠쓰는 사내들은 백기를 말리지 않았다. 문이 열리면 끌려나가고, 고함을 지른 뒤 다시 돌아오는 지긋한 하루의 반복에서, 백기에게 희망을 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창문 없는 옥중 생활은 하루가 언제 저물고 다시 떠오르는 지 알 수가 없어, 백기는 손가락을 대중 세어보았다. 몇일이나 되었을려나. 5번 정도 잠을 자고 깨어 났던 것 같다. 그 정도의 시간이 지났으려나. 쓰러져 피 흘리는 그래를 안아보지도 못하고 순사들에게 끌려서 이 곳으로 왔다. 다행이라면, 아직까지는 고문 없이 이 곳에 머무르게 한다는 사실이었다.


 

심문을 하는 수사과장은 몹시 날이 서 있었지만, 여느 심문과는 다르게 별 다른 폭행이 없었다. 큰 의문을 가지진 않았다. 자신이 안영이의 파트너로 그 곳에 합류했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같은 범죄를 저지르더라도 일본인, 돈 많은 친일인의 자제, 조선인에 대한 벌은 천차만별이었고, 지금 백기는 돈 많은 친일인의 지인으로 이 곳에 갇힌 것이었다.


 

혐의로 봐선 당장 총살을 당하더라도 무리 없는 사건이었다. 백기는 총을 쥐고 있었고 총독각하와 대화를 나누던 사람이 사상을 당했다. 그러나, 안영이의 파트너라는 신분만으로 아직까진 별 다른 상해없이 이 곳에 갇혀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의문이 많았다. 안영이의 정보에 오류가 있었을까. 우리 측 기밀이 세어나간 것일까. 중요한 것은 일은 꼬였으며 작전은 실패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가 다쳤다. 원수의 옆에 있던 처연한 어깨가 유달리 작아보였다. 사사로운 감정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한석율이 의도했던 것이 그 것이라면 그는 백번은 더 성공했다. 연인이 다칠지 모른다는 사사로운 감정이 결국, 그래가 다치는 것을 초래하고 말았다. 장그래가 피를 흘린 순간 백기는 모든 의문을 상실했다. 그들이 왜 자신이 알고있는 작전시간에 맞춰 총을 꺼내지 않았는지 이미 그 중심은 소멸되었다.


 

총을 든 자신이 그래를 향해 달려간다면, 아픈 장그래가 얼마나 더 다칠지 알 수 없었던 백기는 그냥 총을 내려놓고 순사에게 끌려가며 항복했다. 원망의 눈빛은 그 날 이후로 백기에게 원죄처럼 따라붙었다. 다시 그래를 본다면,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할까. 다시 그래를 보게 될 수는 있을까. 용서를 빈다는 행위가 선하고 연약한 그래에게 짐을 지어주는 일이지 않을까. 뇌속을 헤매는 파동은 멈출 생각을 하지 못한다. 두통이 몰아쳤다. 언제부터 장그래는 고통을 수반하는 존재가 된 것일까. 그 원인이 자신임을 아는 백기는 결국 무릎에 고개를 파뭍었다. 두통을 즐겨야한다.









 

"미안해"


 

영이는 답지 않게 목소리가 작아졌다. 처음 영이를 찾는 석율의 연락에서 부터 영이는 평소답지 못했다. 자신이 조선으로 돌아온 이후, 처음으로 석율이 먼저 자신을 찾았다. 반가움 따위는 없는 감정이다. 그와 나눌 대화가 흙빛이 가득한 것을 알기에 영이는 자신을 먼저 찾아준 한 석율이 반갑지 않아 오히려 미안했다. 벌을 받으러 교탁 앞에선 아이처럼, 저절로 고개는 땅을 향했다.


 

"그래씨 몸은, 좀 괜찮아?"

"덕분에"


 

좀 비꼬는 소리로 들린다. 평소 같았더라면 던졌을 단단한 직구의 말도 영이는 다시 집어삼켰다. 서론부터 일방적으로 한 쪽이 죄인이 되고야 만 둘의 대화는 쉽사리 이어지질 못했다.


 

"...할 말 어서 해. 그래가 기다려."


 

자신이 먼저 영이을 찾았다는 사실을 잊은 것인지 석율은 영이에게 대화의 시작을 종용했다. 흔들리는 눈동자의 안 영이는 테이블 위로 놓인 양음료를 크게 한 모금 삼키고나서야 입을 연다. 조금은 당당함을 찾으려는 태도와, 다소 뻔뻔한 말이 뱉어질... 카페의 공기가 차갑다.


 

"그 날 일은 사고였지. 너도 나도 예상할 수 없었어."

"......"

"그래씨가 다칠 줄 알았었더라면, 너에게 그래씨와 함께 하기를 제안하지도 않았을꺼야."

"안영이. 내가 그런 말 듣자고 널 먼저 불렀는.."

"알아. 이런 변명 듣자고 먼저 연락하지 않았을거란 거."



 

날 선 석율의 목소리를 틀어막은 영이는 다시 당당함을 되찾은 평소의 안영이가 되어 긴 서사를 시작한다.


 

사고라고 한들 우리 둘의 죄를 지울 순 없을꺼야. 너에 대한 시험을 핑계로 함께 죄를 나누게 한 건, 미안해. 이 건 진심이야. 그리고 백기씨와 그래씨에게도 진심으로 사죄하고 싶어. 근데 석율아. 네가 이렇게 분노에 찬 이유가 뭐야? 어쩌면 너도 그래씨가 다칠 위험을 안고 그 곳에 그래씨와 함께 왔어. 그래씨가 다치게 된 것 만으로 네가 나에게 이렇게 분노하는거라면, 도대체 왜? 장그래가 다친 것과 네가 무슨 상관인거지. 단지 파트너란 이유. 너 그렇게 사사로운 정 주는 사람 아니잖아.




 

"또 한 번, 진우라는 사람에게 죄를 짓기 싫은 것. 어쩌면, 진우씨를 위험에 빠뜨렸다는 것. 그게 너의 분노의 원인이야? 이로서 확인이 된 것 같군. 네가 분노하는 이유. 이젠 나 대신 네 죄책감을 대신 지워줄 그래씨가 있으니 그를 잘 보살피고 싶었겠지."

“....”

“그런 그를 망가뜨린 것은 나니까. 네 고통을 덜어줄 이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할 것 이라는 상실감. 그게 전부야.”

“....”

“그래....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인가 보네.”


 


 

영이는 석율이 자신의 지난 죄책감을 지우기 위한 수단으로 자신을 이용한다고 믿었다. 서로가 서로의 필요에 의해 지속됐던 관계는 암묵적이며 끈끈했다. 관계의 지속은 찰기있는 흰 밥풀과도 같았다. 끈끈하면서도 접촉할 수록 더러워지기 일수.  종이가 잘 붙어있나 끈임없이 붙였다 떼어내기를 반복했던 행위는, 종이를 더럽히기만 했다. 결국, 한석율과 안영이도 그렇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친일파 집안을 방패로 무기를 숨긴 안영이와, 일본과 일왕을 위해 목숨바쳐 일할 것 처럼 굴면서도, 제 친구의 가면을 모른 척 해주던 한 석율의 한계는 끝을 모르고 풀리는 실타래의 마지막처럼 허무했다.


 

어떤 대구도 하지 않는 석율을 한참동안 지긋하게 바라보던 영이는 먼저 몸을 일으켰다. 쇠로 된 의자가 테라스의 나무 바닥과 마찰해 삐그덕거렸다.


 

“안영이.”


 

주저없이 돌아서려던 영이를 붙잡은 것은 한 참 어떤 말도 없던 석율이었다.


 

“장 그래를 병원에 대려와 침대에 눕히고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이 뭔 줄 알아?”

“....”

“지금 장 그래 옆에 있는 사람이 장 백기가 아니라 나여서 다행이구나.”

근데, 정신을 차린 그래 입에서 나온 가장 첫 말이 장 백기를 찾는 말이더라고. 화가 치밀어 올라서 시야가 깜깜해진 건 처음이었어. 넌 아주 자신만만해. 너 자신 뿐만 아니라 네 주변의 사람과 사건에 대해서도.


 

“내가, 장 그래를 네 대처품이라고 여긴다는 증거는?”


 

박 진우를 떠나보내고 친일을 결심했지. 아버지의 삶의 방식을 따라서, 어쩔 때는 굽실거리기도 하고, 비위가 상할 때도 많아. 주제파악 못하고 스스로 우월하다고 여기는 왜인들의 이죽거림을 받아내기가 역겨울 때도 있지. 그들의 밑을 핥아대면서 얻어내는 것이라곤 글쎄. 안위, 번듯 해보이는 직업, 또 뭐가 있더라…. 얻는 것보다 참는 게 많은 내가 무슨 죄책감이 있을 것 같아? 도대체 네가 왜 잘 알지도 못하는 박진우를 내 아킬레스건이라고 여기는 것인진 짐작도 못하겠지만, 난 그저 그 놈 덕분에 내 살 길을 정했을 뿐 어떤 죄책감도 없어. 안 영이 너 역시 나에게 있지도 않은 죄책감을 부여하려 노력하지마.  


 

“석율아, 너 스스로도 납득이 안되는 말들로 날 속이지 마.”

“사랑이야.”

“뭐?”

“사랑이라는 말로 밖에 납득이 안돼.”


 

처음 봤을 땐 네 말대로 박진우를 떠올리게 했고 그래서 접근했어. 호기심과 오기. 날 가소롭게 보는 눈빛이 꼭 칼날을 쥔 두 손처럼 매서워서 박진우의 눈을 빼 박았다고 해도 놀라지 않았을 정도였다. 나와 정 반대의 길을 걷는 연인을 지키려고 발발거리는 게, 꼭 똥강아지가 집 지킨다고 망망망 짖는 거 같잖아. 그래서 한낮 조선인 깔아 뭉개고 싶은 오기만 가득 찼어.      

“네가 시험이란 말로 날 농락하기 전 까지는 나도 그런 줄로만 알았어.”


 

그래서 장백기의 총에 쓰러진 장 그래를 보며 느꼈던 희열, 동시에 그 자리에 그를 끌어들인 너와 나에대한 분노. 이해 못 했지. 그만 힘들어하라는 네 목소리가 멀어지고 혼자 병실 복도에 주저앉아 깊게 생각해봤어.


 

사랑.


 

그 이유가 아니면 내가 분노할 이유가 뭐야? 푸른 천을 덮고 누워있는 얼굴이…. 너무 예쁜거야. 그냥 바람 부는대로 살면 될 것을, 애국을 빌미로 자신을 뒤로 하는 연인은 그만 좀 버렸으면, 세상엔 그가 누릴  수 있는 아름다운 것들이 많은데.


 

“그가 나에게 빠지게 하는 게 내 오기였는데, 내가 당해버렸어.”

“....”

“그러니까 안영이, 이 걸로 우리 우정이 돌아설 일은 없어. 장 그래는 널 대체할 사람도 아니고, 너나 그래가 내게서 덜어내 줄 죄책감 같은 것도 없다. 비록, 너에게 실망은 했지만.”


 

영이는 다시 한 석율을 볼 수 있을까 궁금했다. 절연을 선언하는 자신에게 구구절절한 연애감정을 고하는 행위는 절대 그녀의 절연을 받아드리지 않겠다는 의지와도 일치했다. 면목이 없는 것은 둘째로 하고, 과연 석율의 말을 어디까지 진실로 여겨야 하냐에 대한 의문이 그녀와 석율의 차후관계를 걱정시키는 것이었다. 쉽사리 제 감정을 잘 들어내지 않던, 영이의 눈에 쏙쏙 들어났던 것들도 그림자 아래로 숨길려하던 녀석의 고백은, 영이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래서 영이는 차마 석율에게 아무 말도 없이 홀로 이별을 고했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겠지.’


 

실망했다는 말에 대한 죄책감. 석율의 진실성에 대한 의문. 영이는 이 것들이 해결 되기 전 까지는 차마 석율에게 먼저 다가가지 못하겠단 생각을 한 채 걸음을 옮겼다.  





 

애초에 얼마 없던 짐은 이주일 이라는 긴 입원 기간이 지났다고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몇 가지의 옷자락만 보자기에 꽁꽁 싸맨 그래는 얌전히 간이 침대에 걸터앉아 누군가를 기다렸다. 텅 빈 1인실은 시계초침이 움직이는 소리만 감돌았다.


 

팔 한 쪽의 상처는 흉이 졌지만 더 이상의 진통 없이 깔끔하게 치료 되었다. 병원복을 입고 누워있는 것도 민망한 그래에게 입원을 강요한 것은 석율이었다. 혹여 파상풍이 걸릴지도 모를 위험을 예방해야한다는 설득에 그래는 하는 수 없이 침대에 머리를 뉘였다. 실은, 그의 설득보다 잠깐이나마 쉬고싶었다. 이 병실을 나가면 또 다시 살같을 파고드는 걱정거리들로 잠을 못 잘 것이다. 일본 경찰들로 부터 안위를 지키는 것, 또 다시 눈 앞에서 사라진 백기를 찾아 헤메는 것, 먹고 사는 문제까지. 비록 한 석율의 보살핌 아래라곤 하지만 모든 걱정을 떼어놓고 쉴 기회는 이번이 유일한 것 같았다.


 

혼자 가도 된다는 그래를 차로 데려다준다며 굳이 만류하던 석율은 그래가 병실에 입원한 이 주 내내 그의 시중이라도 되는 듯 그를 보살폈다. 날이 선 말투와 다르게 몸 위로 두툼한 도포를 덮어주던 몸짓이 낯설었다. 그래서 장그래는 더더욱 그에게 ‘백기’의 이름을 꺼내지 못했다. 파티에 데려갔다는 죄책감으로 이렇게 꾸준히 그래를 간호하는 그에게 연인의 이야기를 먼저 내뱉을 정도로 장 그래는 모질지 못했다.


 

때 마침 병실 문이 열리고, 그래가 한 참을 기다리던 이가 얼굴을 내밀었다.


 

“준비 다 됐나”


 

바쁘게 달려온 듯 헝크러진 앞머리를 달고 온 석율은 빠른 눈으로 병실 안을 훑었다. 그리 크지도 않은 병실이건만 조금이라도 빨리 그래를 찾으려 움직이던 눈동자, 그런 석율을 바라보던 그래는 대답없이 고개를 끄덕이고선 앉아있던 몸을 일으켜 석율의 맞은 편으로 다가갔다. 한 번 도 그래가 먼저 다가온 적이 없어 그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석율의 눈 위로 그래의 손이 스쳤다.


 

“바쁠 것도 없는데, 왜 이리 흐트러지셨어요.”   


 

석율의 얼굴 위로 온기가 스쳐 지나갔다. 머리를 만져주는 행위에도 애무를 받는 것 처럼 더워져 부끄러운 석율은 그래를 볼 수가 없어 두 눈을 내렸다.


 

“한 석율씨. 그 동안 고마웠어요.”

“.... 장 그래”

“파티에 대려다 준 것도, 간호 해준 것도.”

“....”

“말은 안했지만 한 석율씨 좋은 사람인 것 알아요. 무슨  상처가 있는지는 몰라도…. 이제 더는 죄 짓고 살지 말아요.”

“....크흣, 그말이 하고싶었던 거야?”

“당신, 나쁜 사람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으니까.”


 

침대 위에 놓인 가벼운 짐을 손에 들고 그래는 먼저 병실을 나왔다. 한석율을 놀리고 싶어서 혹은 그의 악행을 비꼬고싶어서 꺼낸 말이 아니었다. 백기의 동지인 영이씨의 행적을 모른 척 해주던 일, 백기와 언성을 높이고 갈 곳없던 저를 품어준 일, 총을 맞고 쓰러진 자신을 이 병원까지 데려와 몇일 밤낮을 옆에 있어준 것도 그에게 ‘선함’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믿었다. 그의 악행은 상처에서 비롯 될 것이라 믿었다. 심지어 그래에게 행한 강압적인 행위 까지도.


 

먼저 나온 그래의 손은 쉽게 붙들렸다.


 

“어디가”

“집에 가야죠”


 

붙잡는 손에 꽤 힘이 들어가있어 아플텐데도 하얀 얼굴에 장그래는 인상 한 번 쓰지않고 석율을 마주했다. 방금 전 장그래가 가다듬어줬던 앞머리는 또 다시 장그래에 의해 흐트러져 버렸다.


 

“놔줘요.”

“나쁜 사람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글쎄, 난 그딴 거 바라지도 않아.”

“한석율씨.”
“십 년 뒤, 이 십 년 뒤에 네가 나를 기억이나 할 거 같아?”

“....”

“당장 내일이라도 날 잊고 살거잖아 넌!”


 

장 그래는 어떤 대구도 할 수 없었다. 소리를 지르고 참담한 표정을 짓는 한 석율에게 그 무슨 말을 해도 그는 화살로 받을 것이었다. 잊지 않는다는 말. 한 편으로는 당연한 말이지만 그래의 입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 잊지 않음은 동시에 기억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그 의지는 화자의 뜻과는 상관없이 청자의 심장을 간질여 고통스럽게 만들어버린다.


 

아무 말도 없는, 그러나 여전히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석율을 바라보는 장그래. 석율은 그 바둑알처럼 까만 두 눈을 마주치자 머리에 피가 도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손 안에 쥐여진 여린 손목이 느껴진다. 힘을 쥐자 약간 고통이 밀려오는 듯 입에서 가녀린 탄성이 뱉어졌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들었지만 그는 손에 조금 더 힘을 쥐었다.


 

“네 맘대로는 못하지.”


 

폭력적으로 손목을 쥐어 끌고가는 뒷통수에 그래는 고통이 밀려와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이 석율을 따라야만 했다. 병원에 있는 이들 모두 그들을 보았지만, 보안과장 한 석율의 앞 길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놓으라고 발버둥을 치는 몸짓도, 몇 날 병원에 누워있던 자의 움직임이였기에 석율에게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빨라지는 석율의 발걸음에 쫒아오는 걸음 또한 속도를 겨우 맞췄다. 허름한 병원건물 앞 어울리지 않는 차. 한 손은 그래의 손목을 잡느라 바쁜 와중에 다른 손으로 정장 상의에서 열쇠를 꺼내든 석율은 결국 제 의지대로 그래를 조수석에 태우고나서야 만족한 듯 입꼬리를 올렸다.


 

“내려줘요!”

“시끄러워. 내 집으로 갈꺼야.”

“내가 왜 당신 집을 가.”

“....”

“백기가 기다려요.”

석율이 잡은 운전대가 거칠게 움직였다. 여태 알면서도 모르는 척 꽁꽁 숨겼던 이름이 이제서야 그래의 입 밖으로 나온다. 참고 참았던 분노가 그의 이름 두 글자로 터져버린 것인 지 있는 힘껏 엑셀을 밟는 석율은 아무 것도 보이지가 않는 경주마 처럼 차를 몰았다.


 

“총독 각하 앞에서 함부로 총을 들이댄 녀석이 지금 널 기다리고 있을 리가 없잖아.”

“.... 그럼 제가 기다릴거에요.”

“살아 돌아올 거라 장담은 하나보군.”


 

거칠게 움직이던 석율의 차가 도로 한복판 귀퉁이에 멈춰섰다. 여전히 흥분감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씩씩 숨을 뱉는 석율과, 무서운 속도감으로 공포에 질린 그래. 둘 사이에 정적도 차가 막 멈춘 틈, 잠시였다.

“네가 기다린다고 그는 돌아오지 않아.”
“아니요. 돌아옵니다. 여태까지 그랬으니까.”

“지금까지와 다른게 뭔줄 알아? 모든 사건의 전말을 아는 목격자는 나고, 내가 장 백기 목숨 하나 쥐락펴락할 능력 쯤은 충분히 있다는거야.”


 

부정한 권력. 그 뿌리가 부정한 힘은 아무리 정의로운 자에게 권한을 준다하더라도 결코 정당하게 쓰이지 못한다. 하물며, 부정한 권력을 얻고자하는 이들 대부분 정의롭지 못한 자이며, 부정한 방법으로 권력을 얻는 것이 대분분이거늘, 그들에게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 오히려 부정하지 않을까.


 

“이제 니 옆에 있은 사람이 얼마나 무섭고 더러운지, 좀 실감이 나?”

“한석율씨…. 제발 이러지 말아요.”


 

대화가 길어질 수록 둘의 호흡도 빨라졌다. 공포와 흥분. 각기 다른 이유로 숨이 달아오른 둘은 계속해서 서로의 말만 할 뿐 좀 처럼 대화가 이어지지 못했다. 한석율의 협박은 장그래를 자극했다. 그가 유일하게 지키고 싶어하는 것. 그의 유일한 보석. 지금과 같은 시련은 처음이 아님에도 겨울 바람 앞 여린 풀꽃은 한 없이 몸을 나부꼈다.


 

어떤 의지도 상실한 장 그래는 결국 석율의 차 유리문에 고개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잠깐 사이에 차의 시동이 꺼지고, 차에 몸을 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내릴 때 역시 석율에게 한 쪽 팔을 붙잡힌 채 끌려나왔다. 내린 곳은, 낯선 곳이 아니였다. 어느 밤, 이성을 잃은 채로 머물렀던 곳. 석율의 집이었다.


 

석율은 침실에 그래를 던지듯 데려다놓은 뒤 문을 닫았다. 마음 같아선 밖에서 잠글 수 있는 열쇠를 당장 구하고 싶었다. 꽉 지은 주먹으로 벽을 한 번 내리 친 뒤 그는 방 안의 그에게 낮은 목소리로 고했다.



 

“내일까지 생각하도록.”

“....”

“이 집에 계속 머물지.”

  


 

 

+)


 

“정무총감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각하, 고정하시옵소서.”

“내가, 내가 지금!!! 머리에 총을 맞을 뻔 했다고!! 내 부하한테!!”


 

쉽게 밝혀질 것 같지 않던 전말이 들어나고 있었다. 총독은 진범의 사주를 알아내었다.


 

“관련된 자들 모두 체포하려 했으나, 그 자리에 총을 쥐고 있던 사내를 제외하고는…. 더 이상 밝힐 자가 없습니다. 게다가, 그 자를 아무리 조사해보려해도 정무총감과의 연결고리가 보이지가 않아서…. 석방을 해야할...”

“무어!! 석방! 감히 총독의 머리에 총을 들이민 자에게 어찌 석방이란 단어를 써!”

“...각하. 여론을 신경쓰셔야 합니다. 이 번 사건 관련 조선인 소식에 조선이 들끓을 수 있습니다. 게다가 사주가 정무총감이라면, 천황폐하에게 말이 들리는 것도 순식간입니다. 쉽게 쳐냈다가 각하께서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감히 총을 들이민 그 녀석을 사형집행이라도 당장 하고 싶었지만 조선인의 사형소식에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 여론이 쉽사리 흔들리기 딱 좋았다. 게다가 정무총감과 총독의 내력싸움이란 것이 공식화 된다면 총독 자리까지도 위험했다. 대륙진출을 목표로 하기도 바쁜 시기에 내력싸움에 눈 감아줄 천황이 아니었다. 총독은 숱 없는 머리를 쓸어내린다. 그럼 어찌하는 게 좋단 말이냐.


 

“아직 언론에 어떤 보도도 없었거니와, 그 자리에 초대된 내빈 모두 제 목숨 하나 건재하기 위해 쉽게 입을 열지 않는 상황입니다. 조용히 묻어두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 좋아. 당분간 무슨 일이 있어도 조선 땅을 지키고 있어야겠다. 체포된 이는 빠른 시일 내에 석방시키도록.”

'연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린 새를 위하여 18  (0) 2015.07.27
어린 새를 위하여 17  (6) 2015.06.21
어린 새를 위하여 16  (0) 2015.06.21
어린 새를 위하여 15  (0) 2015.06.21
어린 새를 위하여 14  (0) 2015.06.21
2015. 9. 6. 21:04 · RSS · 트랙백 · 댓글달기 · 연재 ·
의 댓글이 달렸습니다.